[파멸의 늪, 불법 사금융]<下> 갈곳 없는 금융 소외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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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 7등급 이하 681만명, ‘작업 대출’에 두번 울다

김모 씨(33·여)는 연이율 100%를 넘어가는 일수 20여 개를 찍으며 근근이 아동복 가게를 운영하던 중 운영비가 부족해지자 지난해 서민금융대출 상품인 미소금융 대출에 대해 알아봤다. 그러나 ‘보유 재산 대비 채무액 비율이 50%를 초과할 경우 대출이 불가하다’는 대출 부적격자 관련 조항을 보고 나서 포기했다. 김 씨는 “미소금융 대출이 안 될 확률이 100%인 데다 대출이 된다고 해도 오랜 시간 끌어야 할 것 같아 포기했다”고 말했다.

○ 금융소외자에게 까다로운 정부 대출


김 씨는 신용등급 8등급이어서 은행권 대출이 불가능했다. 미소금융 대출까지 포기한 그는 일수 대출을 30개까지 늘려가며 운영자금을 대다가 돈을 제때 갚지 못해 사채업자들의 추심에 시달리다 가게를 접었다. 일수를 쓴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져 올해 초에는 이혼을 했다. 지금은 낮에는 식당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고 있다. 김 씨는 “정부 지원 서민금융상품은 수십 개의 조건을 달아놓고 ‘하나라도 자격이 안 되면 계속 사채를 쓰라’고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 씨처럼 신용등급 7등급 이하로 제도권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금융소외자가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681만 명에 달한다. 정부는 금융소외자를 위해 시중은행, 기업과 공동으로 미소금융, 햇살론 등의 서민금융상품을 내놓았지만 실제로 대출받은 서민은 소수에 불과하다. 미소금융중앙재단에 따르면 2010년과 지난해 재단을 통해 대출 상담을 한 사람은 12만9549명이었지만 최종 대출을 받은 사람은 2만7622명으로 21.3%에 그쳤다.

○ 사채업자들이 정부 대출 알선도


정부 지원 대출의 문턱이 높다는 점을 악용해 수수료를 받고 정부 대출을 알선하는 일명 ‘작업 대출’까지 이뤄지고 있다. 사채업자 A 씨(34)가 설명하는 ‘작업 대출’ 수법은 이렇다. 급전이 필요하지만 직업이 없어 햇살론 대출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을 겨냥해 사채업자들은 허름한 방을 임시로 빌려 ‘가짜 사무실’을 만든다. 여기에 휴대전화 상자를 가득 쌓아놓은 다음 온라인으로 휴대전화 판매 사업자 등록을 하고 114에도 전화번호 등록을 한다. 그 뒤 햇살론 대출을 해주는 은행에 직업을 증빙하는 각종 서류를 구비해 제출하면 은행 대출 현장 실사 담당 직원이 사업장을 방문한다. 사채업자들과 고객은 영업하는 곳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직원들은 사업장 사진을 찍어 간 뒤 대출을 승인한다. ‘작업’에 성공해 햇살론 대출을 받으면 업자는 대출금의 40∼50%를 수수료로 챙기고 고객은 나머지 돈을 받는다. A 씨는 “서민금융상품의 대출 절차는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영업장을 확인하는 실사 절차는 미리 날짜가 공지되고 사업장 사진을 찍어 가는 게 전부”라며 “실제로 이 돈을 가게 운영에 쓰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작업 대출’을 받은 이후에도 별문제가 없다”고 전했다. 금융위원회는 이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2월부터 현장 실사 업무를 지역 신용보증재단 직원이 대신 하도록 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진만 찍어 가는 수준에 그친다는 것이 사채업자들의 증언이다.

○ 서민금융상품 컨트롤타워 필요


전문가들은 대출 절차와 자격 요건은 까다로우면서도 사후 관리는 허술한 현재의 서민금융상품 운용을 대출 수요를 정확히 파악해 서민 각자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함으로써 일대일 식의 ‘유연한 대출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사후 관리도 엄격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돈을 빌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처럼 대출자가 돈을 갚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후 밀착 컨설팅을 통해 대출 이후 모든 단계를 꼼꼼하게 지원해야 서민금융상품의 의미도 살리고 도덕적 해이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서민금융상품이 활성화되기 위해선 기획 및 대출 업무, 사후 관리 업무 등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하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상빈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칭 ‘서민금융공사’를 만들어 서민금융상품 기획을 전담시키고 특별금융사법경찰권을 부여해 불법 사채 피해 발생 시 금융 소비자 보호 활동까지 하게 하는 등 서민금융 분야에만 집중하도록 해야 서민들에게 골고루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 긴급 상담 전화’ 같은 긴급 복지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이헌욱 본부장은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이 사채를 찾기 전에 금융·복지 전문가가 응대하는 ‘금융 긴급 상담 전화’에 전화를 걸 수 있도록 하는 ‘112식 긴급 서비스’를 개발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불법사채#사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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