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3>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자― 5가지 제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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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만큼 낸다” 원칙만 지키면 앞집도 뒷집도 웃을 겁니다

[공존 자본주의에서 길을 찾다]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자
《 15년간 대기업에서 일했던 김모 씨(43)는 3년 전 커피전문점을 차리면서 소득이 50%가량 늘어 연소득 1억 원을 훌쩍 넘었다. 하지만 그가 내는 세금은 연 450만 원으로, 직장인 시절 부담하던 600여만 원보다 150만 원가량 줄었다. 세금을 이만큼 줄이는 데 특별한 묘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속일 수 없는 카드 매출은 그대로 두고 현금 매출을 절반 이하로 줄여 신고하면 그뿐이다. 김 씨는 “카드 매출과 현금 매출이 비슷하지만 현금 매출은 5분의 1로 줄여 신고했다”며 “자영업자 대부분이 그렇게 하지만 들통 났다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고 말했다. 한국은 세금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관행처럼 자리 잡은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탈루, 자산 보유자에게 관대한 세금체계와 고소득자에게 유리한 세금 감면이 어우러져 ‘조세정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 주소다. 실제로 많은 국민은 ‘국가는 잘사는데, 국민의 삶은 갈수록 쪼들리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불평등한 세금’을 꼽는다. 실제로 통계청의 ‘2011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공정사회를 위해 개선해야 할 부문으로 ‘조세’(27.8%)라고 답한 비중이 가장 높았다. ‘일자리 문제’(25.2%)는 그 다음이었다. 망가진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고 복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줄줄 새는 세금부터 막아야 한다. 고소득자 탈루 방지와 자본과세 체계 및 각종 비과세·감면제도를 정비하면 40조∼50조 원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다. 20% 안팎인 조세부담률을 북유럽 복지국가 수준인 30%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120조 원의 상당액을 충당할 수 있다. 》
① 사업용 계좌 신고 의무화하자

세금의 사각지대를 줄이려면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탈루 관행을 바로잡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민간소비 지출액은 615조 원에 이른다. 하지만 카드와 현금영수증 사용액 478조 원을 제외한 137조 원 대부분은 세금 없이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이를 근로소득자 소득파악률(80%) 만큼 세원(稅源)으로 추가해 자영업자 실효세율인 13%가량의 세율을 매기면 약 14조 원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처럼 막대한 세금이 새는 것은 한국의 자영업자에 대한 소득 파악률이 50∼60%로 미국과 일본(80% 수준)에 비해 크게 낮기 때문이다. 자영업자에 대한 세무조사 비율이 0.09%로 미국, 일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점도 자영업자들의 탈루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전문가들은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사업용계좌 사용명세 신고를 의무화하는 정책을 도입할 것을 강조한다. 사업용 계좌 제도는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소득을 파악하기 위해 2008년 도입된 제도.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사업과 관련한 모든 거래에 사업용 계좌를 사용하도록 의무화하면 현금소득 파악률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다.

현재는 국세청에 사업용 계좌 개설 유무만 신고하도록 돼 있어 세무조사를 벌이기 전까지는 실제로 사업용 계좌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김재진 조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세원 확대 측면에서 고소득 자영업자의 소득 파악률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소득세 신고 때 사업용 계좌 사용명세를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면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현금거래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② 고액거래 신고제 도입하자


‘고액현금수취 신고’ 제도도 고소득 자영업자의 탈세를 막는 대안으로 꼽힌다. 이는 일정 금액 이상을 현금으로 거래할 때 국세청에 신고하도록 하는 제도다.

미국에서는 현금 거래를 통한 자금 세탁을 방지하기 위해 1985년 이 제도를 도입했다. 1만 달러(약 1150만 원) 이상의 현금 거래 시 15일 내 미국 국세청(IRS)에 보고하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최대 50만 달러의 벌금과 5년 이하 징역의 형사처벌을 내릴 수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국내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세금 탈루율은 50%에 육박한다. 특히 고액현금이 오가는 대표적인 업종인 주점, 스포츠센터, 부동산 임대업의 탈루율은 60∼80%에 이른다.

고액현금 거래정보에 대한 국세청의 접근권한을 확대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 2000만 원 이상의 현금 거래는 금융정보분석원에 보고가 되지만 탈세혐의가 포착된 극소수 자료만 국세청에 제공된다. 지난해 고액현금 거래 1148만 건 가운데 국세청에 통보된 자료는 0.4%인 4만여 건에 불과하다.

③ 소득수준 따라 자본소득 과세하자


A 씨는 몇 년 전 파생상품 투자를 활용해 자녀에게 60억 원을 물려줬다. 증시가 계속 오름세를 타고 있던 시점에서 주가지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자신은 60억 원의 손실을 보는 대신 자녀가 60억 원의 이익을 보는 계약을 한 것. 누진 구조인 상속·증여세 세율이 최고 50%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25억 원가량의 세금을 탈세한 셈이다.

자본소득에 대한 세금 감면도 공정과세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2010년 이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30개국 중 주식 양도차익에 대해 세금을 감면해주는 곳은 한국을 포함해 6개국에 불과하다. 특히 국내에서는 파생상품 거래세가 전액 면제되다 보니 파생상품을 활용한 편법적인 ‘부(富)의 대물림’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주식 양도차익에 대해서만 세금을 물려도 추가 세수는 2009년을 기준으로 12조6000억∼25조2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단기간에 주식과 파생상품 양도차익에 대해 과세하면 금융시장이 위축되거나 외국인 투자자금이 이탈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전문가들은 소액투자자에 대해서는 비과세를 유지하고 소득수준과 투자기간별로 세율을 달리해 단계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미국은 소득수준과 투자기간에 따라 소액투자자의 장기투자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반면 고소득자의 1년 미만 단기투자에 대해서는 최고 39.6%의 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④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낮추자


금융소득종합과세를 강화하자는 목소리도 크다. 현재 국내에서는 이자와 배당소득이 연간 4000만 원을 넘으면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로 분류해 최고 38.5%의 세율을 매기고 있다. 금리를 5%로 가정할 때 1년간 8억 원 이상의 돈을 통장에 고스란히 남겨둘 정도의 ‘금융부자’여야만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사실상 금융소득은 최고의 자산가 계층을 빼고는 저소득층이든 고소득층이든 같은 세율로 세금을 내고 있는데, 이는 과세형평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다. 예금금리가 연 5%인 경우 5억 원 예금주나 100만 원 예금주나 똑같이 이자소득에 대해 15.4%(이자소득세와 주민세)의 세금을 내기 때문이다. 오윤 한양대 법학과 교수는 “금융시장에 미칠 충격을 감안해야 하지만 금융시장 성숙도를 감안할 때 과세형평을 위해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을 1000만 원으로 낮추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⑤ 비과세-감면혜택 줄이자


눈덩이처럼 불어난 각종 세금 감면 혜택도 ‘조세정의’를 막는 걸림돌이다. 지난해 비과세·감면 혜택을 받은 국세는 30조6000억 원으로 2006년(21조3000억 원)에 비해 10조 원가량 늘었다. 비과세·감면 혜택을 절반으로만 줄여도 15조 원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특히 선진국과 비교해 세금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낮은 것은 각종 공제혜택으로 소득세 수입이 전체 세수의 15% 정도로 선진국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소득공제가 이뤄져 고소득자일수록 소득공제 혜택이 커지는 구조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2009년을 기준으로 연소득 1억∼2억 원인 고소득자의 공제액이 약 61만 원으로 연소득 2000만∼4000만 원인 사람의 평균 공제액 7만6000원의 8배에 이른다. 강석훈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비과세·감면 항목을 폐지할 때마다 특정 계층의 반발로 정치권이 조세원칙에 맞지 않는 결정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비과세 감면과 각종 공제부터 구조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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