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사나이’ 박태준 1927~2011]영일만 허허벌판서 ‘제철신화’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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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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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보국… 우향우 정신… “포철 지키려 정치 입문”
‘與대표 → 4년 낭인 → 총리’ 부침

“당신은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 어디서나 가장 앞에 서 있었다. 6·25전쟁 때는 장교로 투신했고, 국가가 경제 현대화를 요구했을 때 당신은 기업인으로 나라 앞에 섰다. 국가가 미래를 위한 정치인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또 정치인으로 그 부름에 응했다.”

1990년 11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때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이 같은 말로 치하했다. 군인과 기업인, 정치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박 명예회장은 한국 경제개발 신화의 주역이자 다시는 없을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로 평가받는다.

○ 철강이 종교

2001년 미국에서 폐 밑의 물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은 직후 박 명예회장은 수술 전 작성했던 유서를 찢어버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장에서 숱하게 마신 모래들, 정치하면서 쌓인 온갖 먼지들이 물혹에 다 들어 있었을 텐데, 이제 그 혹을 떼어냈으니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 같은 느낌이야.”

하지만 10년 후, 이 수술의 후유증으로 박 명예회장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창업 당시부터 26년 동안 최고경영자로 일한 박 명예회장은 ‘철강이 종교’라고 말하곤 했다. 박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소 설비 가동 첫해인 1973년 416억 원, 46억 원이었던 포항제철의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을 1992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매출액 149배(6조1821억 원), 순이익 40배(1852억 원)로 늘렸다. 이는 포스코가 설비 가동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흑자 행진을 지속하는 기틀이 됐다.

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철강을 만들어 국가에 보답한다)의 기업이념과 소명의식,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과 기술개발의 경영이념을 솔선수범한 최고경영자로 평가받는다.

○ ‘우향우 정신’

박 명예회장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바로 ‘우향우 정신’이다.

“고귀한 선조의 피 값으로 시작한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몇 사람의 사표로 끝날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우향우’하여 동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

이는 박 명예회장이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직원들에게 수시로 했던 말이다. 당시 박 명예회장이 숙식을 해결하던 ‘롬멜하우스’에서 오른쪽을 향해 걸어가면 동해 바다가 나왔다. 박 명예회장은 1992년 신동아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포항제철소 건설 기간 내내 직원들에게 이 말을 강조했다”며 “철이 성공하면 나라가 살고, 철이 실패하면 나라도 망한다. 나는 철에 목숨을 걸었다”고 말했다.

‘롬멜하우스’는 박 명예회장과 포스코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는 공간이다. 포항제철소 용지인 약 759만 m² 규모의 영일만 모래밭 귀퉁이에 박 명예회장은 슬레이트 지붕을 덧댄 2층 목조건물을 짓고 숙식을 해결했다. 박 명예회장은 “그 모습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전의 영웅이었던 로멜 장군의 야전 지휘소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있었다”며 “현장 사원들은 자연스럽게 그 건물을 ‘롬멜하우스’로 불렀다”고 회상했다.

박 명예회장이 이 롬멜하우스에서 하루 3시간만 자는 강행군으로 공사를 진두지휘할 수 있었던 것도, 현장 곳곳을 누비며 피곤에 지친 직원들을 독려하고 때로는 질타했던 것도 다 ‘우향우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이 같은 열정에 직원들도 열과 성을 다해 헌신했다. 올해 9월, 포항에서 열린 퇴직 임직원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박 회장의 사심 없는 열정이 있었기에 최선을 다했고, 이는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향하는 발판이 됐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 “중국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다’는 이 유명한 말은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주석과 신일본제철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의 대화에서 비롯됐다.

1978년 신일본제철을 찾은 덩 주석은 이나야마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소와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나야마 회장의 거부 의사에 덩 주석은 그 이유를 물었다.

이나야마 회장은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짓습니다”라며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항제철소 같은 제철소를 지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덩 주석은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답했다.

○ 순탄치만은 않은 정치 역정

박 명예회장은 4선(11, 13∼15대) 국회의원에 집권당 대표, 국무총리를 지내며 정치권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정치역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경영에만 전념하던 그의 정치 입문은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후 국회를 대신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하고 박 명예회장에게 경제분과위원장을 맡긴 것이 계기가 됐다. 이어 제5공화국 출범 후 11대 민주정의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박 명예회장은 훗날 “정치 입문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자의라기보다는 권력으로부터의 각종 외압에서 포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주변에 말하기도 했다. 13, 14대에도 전국구 의원을 지낸 그는 1990년 노태우 정권에서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를 맡으며 정치 전면에 나섰다. 곧이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선 최고위원으로 민정계를 대표했다.

그러나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반(反)김영삼(YS) 진영의 선봉에 섰다가 결국 대선 직전 민자당을 탈당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고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까지 되면서 4년여 동안 정치적 낭인으로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됐다. 절치부심 끝에 그는 YS 정권 말기인 1997년 5월 경북 포항북 보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압도적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이어 1997년 대선 국면에서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함께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연합’으로 불리는 야권연대 결성에 참여했고 김대중 후보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영광도 잠시였다. DJT의 전제였던 내각제 개헌이 유보됐고, 2000년 1월 공동정부 몫으로 총리에 올랐지만 불과 4개월 만에 부동산 명의신탁이 문제가 되자 자진 사퇴했다. 이후 박 명예회장은 현실정치와 선을 그었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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