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재무장관 ‘경주 대타협’]‘경주 대타협’ 나오기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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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경상수지 목표제’ 밀어붙이자 中 수용

“이 정도 성과를 낼지 예상 못했다. 민감한 환율 문제가 너무 일찍 해결돼 정상회의에서 합의할 이슈가 사라져버려 고민할 정도다. 국제통화기금(IMF) 쿼터 개혁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관계자가 23일 경주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가 끝난 뒤 한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이 이제 세계 환율 전쟁의 중재자로 등장했으니 그럴 만하다.

당초 정부는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IMF 구조 개혁까지만 합의를 이뤄내면 100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간 환율 갈등이 불거지면서 환율 이슈가 서울 회의의 성패를 가르는 문제로 급부상하자 정부도 고민에 빠졌다. 9월 중순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비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자는 ‘경상수지 목표제’ 카드를 꺼냈다. 중국이 환율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잘 알고 낸 아이디어다.

한국이 이 아이디어를 G20 국가에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도중 일부 언론에서 관련 내용이 보도됐다. 그러자 한국의 아이디어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던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이 직접 나섰다. 그는 급하게 편지를 써 G20 재무장관들에게 경상수지 목표제에 대한 동의를 구했다. 이때부터 경상수지 목표제의 주도권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옮겨졌다.

독일과 일본 등 경상수지 흑자국은 미국의 편지에 불쾌해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G20 재무장관은 환율 합의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읽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뭔가 환율 합의를 하긴 해야겠구나’라고 압박감을 느꼈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미국은 11월 2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무역적자에 대한 대책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환율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의 강력한 후보로 꼽히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도 국제적으로 관심이 높은 이슈에 대해 성과를 내고자 하는 동기가 강했다.

환율 조율 작업이 경주 재무장관 회의 개최 전에 시작됐다면 IMF 쿼터 조정은 회의장 내부에서 급속도로 일단락지은 사례다. 정식 회의와 별도로 먼저 미국과 유럽 대표들이 따로 만났다. 미국은 스스로 17.67%인 지분을 약 1%포인트 내놓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독일, 영국 등 다른 유럽 국가 대표들은 ‘미국이 자기희생을 하는데…’라며 전향적인 자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어 미국, 유럽, 브릭스 국가가 다함께 만났다. 한국도 G20 정상회의 의장국 자격으로 참석했다. 3차례 더 세부 회의를 거쳐 결국 쿼터 개혁 타협안이 나왔다. 정부 관계자는 “비공식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나라 대표들이 와서 ‘결과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몇 년 전에 한국이 그런 처지였는데 가슴이 뭉클했다”고 전했다.

중국의 협조적인 자세도 돋보였다. 회의에 참석한 정부 관계자는 “중국에 감사한 마음이 생길 정도로 많이 양보했다. 그 덕분에 성명서가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G20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중국에 유리하다는 전략적인 고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G20이 깨지고 주요 8개국(G8)에 중국만 추가될 경우 중국은 어느 한 곳 기댈 데 없이 선진국들에 일방적으로 난타를 당할 공산이 크다.

한국의 숨은 공로도 컸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브라질 등 신흥국 대표들을 만나 “G20 체제가 없어지면 다시 선진 7개국(G7) 체제로 간다. 그럼 당신 국가에도 좋지 않을 것이다”라며 설득했다. 미국 정부를 움직이려면 학계를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브루킹스연구소 등 미국 내 연구소와 세미나를 열어 한국의 의견이 자연스럽게 미국 정부에 들어가도록 묘수를 두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6월 부산 G20 재무장관 회의 때와 달리 직접 경주로 가 환영연설을 하며 “합의를 이루지 않는다면 돌아갈 때 버스나 기차, 비행기를 가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며 ‘압박성 농담’을 던졌다.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회의 직후 “공항 클로즈 발언의 효과가 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에 앞서 이 대통령은 사공일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장을 비롯한 관계자와 회의를 열며 직접 환율 문제를 챙겼다. IMF 지분 개혁과 관련해선 스트로스칸 총재와 수시로 통화하며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IMF가 법적으로 불안정한 기구가 된다”고 설득했다.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이 23일 재무장관 회의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지나가는데 로이터통신 기자가 “한국의 역할이 어떠했나”고 물었다. 그는 “피보타(중심축)”라고 답했다. G20 준비위 관계자는 “이번 회의에서 한국의 조율 능력을 그 무엇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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