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 보험시장 히트상품 만든 콘셉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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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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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고 뒤집고 멀리보고 가려운 곳 긁는 효자손 법칙

《 “손해보험에는 있는데 생명보험에는 없는 게 뭡니까?” 2007년 12월 초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생명 6층 사장실. 이수창 사장이 마케팅, 영업, 정보기술(IT) 담당 임원들을 긴급 소집했다. 정부가 2008년 9월 1일부터 보험상품의 교차판매를 허용하기로 방침을 정한 직후였다. 보통 생명보험(생보)은 종신 연금 등 사람의 생존 또는 사망 보장을, 손해보험(손보)은 자동차 화재 등 재산상의 손해 보장을 위주로 상품을 개발해 왔다. 》
교차판매가 도입되면 둘 사이의 장벽이 낮아져 보험업계의 지각변동이 예고됐던 시절. 이 사장의 목소리에 절박감이 묻어 나왔다.

“의료실손보험과 통합보험이죠.” 상품개발에 잔뼈가 굵은 마케팅 담당 부사장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보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만한 상품이지만 당시 생보업계에서 통합보험을 내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즉시 ‘A90’이라는 태스크포스가 꾸려졌다. ‘1990년대의 영광을 재현(Again)하자’는 뜻. 삼성생명은 1990년대 2위 생보사와의 격차를 압도적으로 벌리면서 승승장구했으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보험업계 경쟁이 격화되자 맹렬히 추격당하는 1위로 몰리고 있었다. 메트라이프 ING 등 외국계 보험사가 국내 시장에 진입하고 영업 방식도 여성 보험설계사 위주에서 방카쉬랑스 등으로 다변화됐기 때문이다.

○ 포화 시장에서 고객 수요 찾아 신상품 개발

A90에 참여한 상품개발 실무자들은 생보사와 손보사의 보장성 보험시장부터 분석했다. 2004년 손보업계가 통합상품을 내놓은 이후 생보업계의 보장성 보험 축소 물량이 고스란히 손보업계로 넘어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객의 수요가 ‘통합’으로 옮아 갔다는 것을 확인하고 상품개발 방향을 보장성 상품을 묶는 쪽으로 결정했다. 이 사장도 틈날 때마다 “삼성생명만의 향기가 묻어나는 독창성을 갖춘 스테디셀러를 만들라”고 독려했다.

상품 시안은 약 3개월이 지난 2008년 4월 나왔다. 종신보험, 치명적 질병(CI)에 대한 보장보험, 정기보험 등 3종류의 주(主)보험에 27가지에 이르는 특약을 추가할 수 있도록 구성해 본인은 물론 자녀와 배우자까지 보장한다는 게 뼈대였다. 상품 이름은 ‘퍼펙트통합보험’, 판매일은 교차판매 허용일에 맞춰 9월 1일로 정했다. 결과는 상품개발 실무자조차 놀랄 정도였다. 가입 건수가 올해 4월 100만 건을 돌파한 데 이어 최근 125만 건을 넘어섰다. 월 보험료가 10만 원이 넘는 상품 중 가입 건수가 100만 건을 넘는 상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 보험시장은 무한경쟁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다. 4월 보험연구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세 이상 개인들의 보험가입률은 92.1%에 이른다. 가구를 기준으로 볼 때에는 96.4%다. 영역을 넓히려고 해도 여지가 별로 없는 사실상의 포화시장이다.
▼ “회사보다 상품 경쟁력 보고 보험 선택” 1년새 10%P 높아져 ▼

이 때문에 상품 경쟁력은 더욱 중요해졌다. 고객들이 앞으로 보험회사를 선택할 때 1순위로 고려하겠다고 밝힌 요소 가운데 상품 경쟁력은 43.8%로 브랜드 신뢰성(21.6%)을 크게 앞선다. 상품 경쟁력을 선택한 비율은 지난해 32.8%에서 1년 사이에 10%포인트 이상 높아진 반면 브랜드 신뢰성은 26.9%에서 5%포인트 이상 낮아졌다. 순수 보장성 보험의 경우 시중은행의 예·적금 상품처럼 예금보호 대상이어서 회사 ‘간판’보다는 상품 경쟁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역발상으로 승부하라

삼성생명의 ‘퍼펙트통합보험’이 시장의 환경 변화에 맞춰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상품개발 사례라면 AIA생명의 암보험은 역발상을 통한 상품개발 사례로 꼽힌다.

최근 상당수 생보사들은 암(癌)보험 판매를 중단하고 암환자가 늘수록 보험료도 따라 올라가는 갱신형 상품으로 전환하거나 주보험의 특약 형태로 돌리고 있다. 암환자가 크게 늘어 암보험을 계속 팔 경우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AIA가 미친 것 아냐?” 보험업계에서 이런 지적이 나온 것은 지난달 초였다. 다른 생보사들이 암보험 판매에 등을 돌리고 있을 때 AIA가 기존의 ‘원스톱 암보험’을 부활시킨 ‘뉴 원스톱 암보험’을 내놓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조차 “암보험은 비갱신형보다 갱신형이 보험사에 유리하다”는 의견을 표명한 상황에서 보험료가 바뀌지 않는 비갱신형 상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화제가 됐다.

AIA가 역발상 마케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국내 시장에 진출한 이후 누적된 고객 데이터였다. 실제로 원스톱 암보험은 2000년 말 처음 나온 이후 10년간 163만 건이 넘는 누적 판매실적을 기록했다. AIA 관계자는 “암보험과 관련한 노하우가 탄탄한 데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리스크 관리가 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기존 상품을 업그레이드한 새로운 상품을 내놓게 됐다”고 말했다. 뉴 원스톱 암보험은 9월 한 달 동안 1만3000건이 판매됐고 10월 들어서도 8000건이 넘는 계약 실적을 보이고 있다.

○ 고령화·저출산 관련 상품개발이 관건

교보생명이 올해 4월 내놓은 ‘교보 100세 시대 변액 연금보험’도 다른 생보사들이 시도하지 않은 상품개발 사례다. 기존 변액 연금보험은 연금 개시 전까지만 자금 운용이 가능하고 연금을 받기 시작하면 시중금리에 연동되는 공시이율을 적용하고 있다. 만약 공시이율이 물가상승률보다 낮아질 경우 연금의 실질가치를 지키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교보생명의 상품은 연금 수령기간에도 적립금을 투자해 연금액에 더해 주는 데다 투자수익이 좋지 않더라도 한 번 오른 연금액은 그대로 보증 지급하는 게 특징이다. 기대수명이 점점 느는 추세에 맞춰 투자기회를 최대한 늘릴 수 있도록 설계된 셈이다. 지금까지 가입건수가 5만1800여 건에 이른다.

생보업계 관계자는 “결혼 연령이 점차 높아지는 데다 저출산 때문에 신규 보험 가입 수요는 줄고, 기존 가입자들은 고령화되고 있어 보험시장의 어려움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며 “독창적인 상품개발 능력과 새 상품을 실시간으로 고객에게 알릴 수 있는 네트워크가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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