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바닥 찍어”… 돈줄 조여 ‘좀비기업’ 솎아낸다

  • 입력 2009년 6월 8일 02시 50분


■ 정부, 중소기업 선별지원으로 왜 선회하나

대출 늘었지만 연체도 급증세… 자금흐름 왜곡 심각
‘벤처거품 전철’ 경계… 일각선 “유동성 죄기 아직 성급”

《금융당국이 중소기업의 옥석(玉石)을 가려 선별적으로 자금을 지원키로 한 것은 자력 생존이 불가능한 ‘좀비(zombie) 기업’들이 정책자금에 기대어 연명하는 탓에 정작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이 자금 지원에서 소외되는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다. 실적 채우기식 대출로 떼이는 돈이 늘면 김대중 정부 당시의 벤처기업 육성 때처럼 국민 세금으로 은행들의 손실을 메우는 사태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도 중소기업의 자금줄을 조이게 된 배경이다. 》

이런 변화가 가능해진 것은 현재의 금융시스템이 건강한 기업까지 도산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최악의 국면에서는 벗어났다고 정부가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무조건 대출’ 부작용 심각

시중은행들은 금융당국의 지침에 따라 올 2월 160조 원의 중소기업 대출금 전액에 대해 원칙적으로 상환기간을 1년 연장했다. 또 보증회사들은 은행 대출금 전액에 보증을 선다는 방침을 정했다. 기업들은 보증서에 도장만 받으면 무조건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올해 1∼4월 중소기업 대출은 12조 원이나 증가했다.

대출은 급증했지만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기업이 늘어나 연체율은 지난해 말 1.70%에서 4월 말 2.59%로 치솟았다. 상환 능력이 안 되면서도 무리하게 돈을 빌린 기업이 많았다는 뜻이다. 일례로 모 보증회사 지점은 작년 말까지만 해도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보증을 거부한 업체에 최근 보증서를 떼어줬다. A은행은 중소기업 신속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10억 원을 대출해줬다가 사주가 1주일 만에 부도를 내고 잠적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금융당국의 고위 관계자들도 이런 부작용을 염려해 정책 전환을 예고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은 1일 임원회의에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는 자원낭비를 초래하므로 유형을 분석하고 현장을 점검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환 금감원 수석부원장은 4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중소기업의 옥석을 가려 자금이 일시적으로 부족한 기업을 선별 지원하되 한계기업은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함량미달 중소기업엔 돈 안빌려줘

무엇보다 금융당국은 벤처기업에 무분별하게 자금을 대줬다가 ‘벤처 거품’만 일으킨 채 큰 손실을 낸 과거의 정책 실패가 반복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벤처기업에 대한 회사채 담보부증권(CBO) 보증제도가 시행된 2001년에는 사주가 정책자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주식 투자를 하거나 미국 등지로 재산을 빼돌린 사례가 많았다. 결국 중소기업 대출에 보증을 해준 금융회사가 부실해져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금융당국은 만기연장을 은행 자율에 맡기기로 한 것과 관련해 “일선 은행들의 연장 비율이 이미 90%를 넘기 때문에 굳이 문서로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은행들은 “중기대출 목표치가 낮아진 상황에서 만기연장비율 규정도 삭제돼 대출심사를 종전보다 철저히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며 반기고 있다. 적어도 분위기에 휩쓸려 함량 미달의 중소기업에까지 돈을 빌려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 “급격한 돈줄 죄기는 바람직하지 않아”

일각에선 이번 조치와 관련해 정부가 전체 유동성을 죄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발행한 통화안정증권 규모가 35조6600억 원으로 1998년 7월(40조5000억 원) 이후 10년 10개월 만의 최대치였다는 대목과 맞물리면서 유동성 정책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통안증권을 발행하면 시중자금이 한은으로 들어와 시중자금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1989년 일본이 거품을 차단하기 위해 성급하게 정책금리를 인상한 것이 ‘잃어버린 10년’의 단초를 제공했다”며 “정책 기조를 긴축으로 바꿀 때로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민간 경제 전문가들도 왜곡된 자금흐름은 바로잡아야 하지만 갑자기 자금줄을 죄는 식의 급진적인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김광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구조조정이 본격화하지 않았고 돈도 잘 돌지 않는 상황에서 유동성을 이전 수준으로 줄이면 경제회복이 더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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