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최악 벗어나” 돈줄 조여 ‘좀비기업’ 솎아낸다

  • 입력 2009년 6월 7일 21시 02분


금융당국이 중소기업의 옥석(玉石)을 가려 선별적으로 자금을 지원키로 한 것은 자력 생존이 불가능한 '좀비(Zombie) 기업'들이 정책자금으로 연명하는 바람에 자금흐름이 왜곡돼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이 지원에서 소외되는 점을 감안한 조치다.

중소기업 대출이 부실화되면 김대중 정부 당시 벤처기업 육성정책 때문에 대규모 손실이 난 것처럼 국민 세금으로 손실을 메우는 일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무조건 대출 확대'에서 '선별 지원'으로 정책 변화를 꾀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 변화가 가능해진 것은 금융시스템이 와해돼 건강한 기업까지 도산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국면을 벗어났다고 정부가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무조건 대출'의 부작용 심각

금융당국과 시중은행은 올 2월 160조 원의 중소기업 대출금 전액에 대해 원칙적으로 상환기간을 1년 연장했다. 또 보증회사가 은행 대출금 전액에 대해 보증토록 해 기업이 보증서만 가져오면 무조건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조치로 작년 말 400조 원 수준이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4월 말 현재 412조 원으로 늘었다.

대출은 급증했지만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기업이 늘어나 연체율은 지난해 말 1.70%에서 4월 말 2.59%로 치솟았다. 상환 능력이 안 되면서도 무리하게 돈을 빌린 기업이 많았다는 뜻이다.

보증회사의 창구 직원들은 "보증 규모를 늘리라는 정부 지시 때문에 심사 기준을 느슨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모 보증회사 지점은 작년 말까지만 해도 심사 기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보증을 거부한 업체에 최근 대출금 전액 보증서를 떼어줬다. A은행은 중소기업 신속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10억 원을 대출해줬다가 업체 사주가 1주일 만에 부도를 내고 잠적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벤처 거품' 되풀이 경계

금융당국은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벤처기업에 무분별하게 자금을 대줬다가 '벤처 거품'만 일으킨 채 큰 손실을 낸 김대중 정부 당시의 정책 실패가 반복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벤처기업에 대한 회사채 담보부 증권(CBO) 보증제도가 시행된 2001년에는 사주가 정책자금을 받아 개인적으로 주식 투자를 하거나 미국 등지로 재산을 빼돌린 사례가 많았다. 결국 중소기업 대출에 보증을 해준 금융회사가 부실해져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이번에 금융당국이 만기연장을 은행 자율에 맡기기로 한 것과 관련해 금융계는 "심사를 종전보다 철저히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셈"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당국은 "2월 은행장들이 올해 중기대출 만기를 연장해주기로 자율협약을 맺었고, 연장 비율이 90%를 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명문 규정으로 은행에 만기 연장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만 은행들은 이미 "중기대출 목표치가 없어진 상황에서 만기연장비율 규정도 삭제돼 자율심사의 폭이 넓어졌다"고 본다.

보증대출을 받은 뒤 잠적하는 '모럴해저드 기업'에 대한 조사 결과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면 보증단계에서부터 부실 우려가 큰 기업이 걸러질 가능성도 높다.

●"본격적 유동성 죄기는 시기상조"

일각에선 이번 조치와 관련해 정부가 유동성을 죄는 쪽으로 정책방향을 바꾸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한국은행이 지난 달 발행한 통화안정증권 규모가 35조6600억 원으로 1998년 7월(40조5000억 원) 이후 10년 10개월 만에 최대치였다는 대목과 맞물리면서 유동성 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통안증권을 발행하면 시중 자금이 한은으로 들어와 유동성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난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1989년 일본이 거품을 차단하기 위해 성급하게 정책금리를 인상한 것이 성장률 급락으로 요약되는 '잃어버린 10년'의 단초를 제공했다"며 "정책 기조를 긴축으로 바꿀 때로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민간 경제 전문가들도 정책 수단을 손질할 필요는 있지만 자금줄을 확 죄는 식의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김광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구조조정이 본격화하지 않았고 돈이 잘 돌지 않는 상황에서 유동성을 종전 수준으로 줄이면 경제회복이 어려워진다"고 지적했다.

홍수용기자 legman@donga.com

이지연기자 chan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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