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깎아주자 룸살롱 가고, 긴급자금 지원하자 떼먹고 잠적

  • 입력 2009년 4월 28일 02시 55분


경제위기 극복 지원책 악용하는 모럴해저드 확산

#1. 대기업에 다니던 정모(31) 씨. 지난해 고급술집을 제집 드나들 듯 하다 빚이 1억 원까지 불어났다. 회사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과 부모에게 받은 돈으로 빚을 절반 남짓 갚은 뒤 작년 말 은행에 채무조정을 신청했다. 은행은 연체이자를 탕감해주고 상환기간도 연장해 줬다. 여유가 생겨서일까. 정 씨는 최근 대부업체에서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 유흥업소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2. A은행은 최근 “회사는 탄탄하지만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제조업체에 중소기업 신속지원 프로그램(패스트트랙)에 따라 10억 원을 대출해줬다. 하지만 이 회사 대표는 자금을 받은 지 1주일 만에 연락을 끊었고 업체는 부도를 냈다. 담당 은행원은 “일부 기업은 곧 망할 줄 알면서도 지원을 요청하는데 은행이 이런 비도덕적인 기업인을 완전히 걸러내긴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각종 지원책에 편승해 부적격자가 이익을 챙기는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 현상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보증기관은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자격이 안 되는 업체에 마구잡이로 보증을 서주고, 정부는 예산을 조기 집행한 실적만 강조할 뿐 그 돈이 꼭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이는지는 따져보지 않는다.



신보-기보 등 보증기관

무리한 목표 세우고

무자격업체 부실보증 남발

‘2001 벤처 부실’ 재현 우려

○ 보증기관, 실적 채우려 보증 남발

보증기관의 모럴 해저드는 바로 국민 부담으로 이어진다. 기술보증기금은 2001년 정보기술(IT) 버블이 한창일 때 벤처 기업에 보증을 남발했다가 버블 붕괴 후 막대한 부실을 떠안았다. 당시 2조2122억 원의 보증 가운데 손실액이 8046억 원이나 됐고, 이는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했다.

최근 보증기관들이 정부의 독려로 앞 다퉈 중소기업 보증에 나서면서 이번에도 무자격 업체에 대한 ‘부실 보증’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 들어 이달 20일까지 신용보증기금이 중소기업에 신규보증을 해준 총액은 7조1766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조3668억 원)의 5.25배에 이른다. 기술보증기금의 신규보증 지원도 3월 말까지 4조3833억 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보증기관 임직원들에 따르면 지점별로 지난해보다 3, 4배 높게 책정된 목표액을 채우는 과정에서 ‘결과가 어떻게 되든 보증부터 해주고 보자’는 식의 모럴 해저드가 심각한 상태다. 신보는 전국 101개 점포의 목표 달성률을 매주 집계해 순위를 공개하고 있다. 실적은 지점장과 직원의 평가, 승진에 직접적인 기준이 되며 성과급까지도 좌우한다. 목표치 달성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부실 보증은 모호한 심사기준 덕에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해당 기업에 가압류나 연체기록이 있더라도 담당 직원이 ‘영업과 관계없는 원인 때문’이라고 판단하면 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요즘처럼 목표치 압박이 심할 때는 결정적인 하자가 아니면 눈감아 준다.

보증을 받기가 쉽다고 소문이 나자 거꾸로 기업들의 모럴 해저드도 나타나고 있다. 도저히 보증을 받지 못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나쁜 기업의 자금 담당자들이 보증기관 영업점에 찾아와 ‘생떼’를 쓰는 경우도 많다. 실제 지난달 한 보증회사 지점을 찾은 중소기업 관계자는 보증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선 “왜 나만 보증을 안 해 주느냐”며 지점장의 책상을 엎어버리기까지 했다. 신보 지점의 한 과장은 “민원 대상이 되면 ‘왜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하고 시끄럽게 하느냐’는 질책을 받는다”며 “청와대나 금융감독원 같은 곳에 민원을 넣겠다고 떠드는 사람에게는 웬만하면 보증서를 내주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 투기 의혹 기업도 정부 지원 내세워 만기 연장 요구

지난해 기업에 큰 손실을 안긴 금융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했던 모 섬유업체는 최근 거래은행에 대출 만기를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은행으로선 정부가 키코 피해 기업에 금융지원을 해주도록 권고한 만큼 기업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당 업체 대표가 잠적하는 바람에 은행으로선 대출금 전액을 손실로 떠안아야 했다. 알고 보니 이 업체는 다른 5개 은행과도 키코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은행 관계자는 “위험 분산보다는 투기 목적으로 키코에 든 것으로 보인다”며 “준(準)공적자금이 들어간 은행이 부실해지면 결국 국민이 손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경영상태가 나쁜 일부 기업주는 채권단과 협의해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는 대신 기업회생절차(옛 법정관리)를 신청하기도 한다. 워크아웃이 시작되면 자산매각 사재출연 등 자구노력을 해야 하지만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경영권을 보장받으면서도 원리금 탕감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부가 발주하는 공공 공사가 늘면서 상당수 건설업체들은 이 공사를 따내기 위해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수도권에 본사를 둔 일부 건설사들이 지방경기 활성화를 위해 시행 중인 ‘지역의무 공동도급제’를 악용해 주소만 지역으로 옮겨 공사를 수주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무늬만 지역업체’인 외지 건설사가 공사를 수주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최근 인천시는 몇몇 건설사에 “주소만 인천에 두지 말고 실질적인 본사 기능을 이전해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가 건설업체의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해 관급공사 수주업체에 대금을 지급하는 시한을 ‘공사 후 15일 이내’에서 ‘공사 후 일주일 이내’로 단축했지만 일부 업체는 그 돈을 금융상품이나 부동산에 투자하고 하도급업체에는 여전히 어음으로 결제하고 있다. 정부가 재정집행에 속도를 내긴 했지만 형편이 좋은 대기업만 잇속을 챙길 뿐 자금 사정이 열악한 영세업체에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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