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돈 그저 쌓아둘 수밖에…”

  • 입력 2006년 11월 22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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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쇼핑은 2월 서울과 런던증시에 상장(上場)하면서 3조4000억 원의 ‘실탄’을 확보했다.

롯데그룹은 이 돈으로 프랑스계 할인점 까르푸를 인수하는 데 쓰려고 했지만 까르푸를 이랜드에 빼앗기자 투자금은 갈 곳을 잃게 됐다.

최근 우리홈쇼핑 지분 53%를 인수하면서 4667억 원을 썼지만 나머지 돈은 아직도 마땅한 투자처를 못 찾고 있다.

자본금 1조1363억 원인 롯데그룹이 회사 내부에 쌓아 둔 돈은 9월 말 기준으로 모두 11조8388억 원에 달한다. 유보율 1041.87%로 10대 그룹 가운데 세 번째로 높다.

롯데그룹 정책본부 이창원 이사는 “돈을 안 쓰겠다는 게 아니라 ‘아직 쓸 때가 아니다’라는 판단 때문”이라며 “어떤 경우든 성급하거나 무리한 투자는 하지 말자는 게 그룹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을 투자금으로 쓰지 않고 그냥 쌓아 두기만 하면서 12월 결산 상장회사(제조업체)의 유보율은 600%를 넘어섰다.

○ 10대 그룹 유보율 700% 넘어

21일 한국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거래소시장에 상장된 12월 결산 제조업체 535개사의 9월 말 현재 평균 유보율은 609.34%. 작년 말 569.71%와 비교하면 39.63%포인트나 많은 것으로 올해 들어 가장 높은 수치다.

유보율은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 가운데 회사에 얼마나 쌓아 두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유보율 증가 현상은 특히 10대 그룹에서 두드러진다. 10대 그룹 유보율은 평균 713.68%로 지난해 말 650.94%에서 62.74%포인트나 높아졌다.

그룹별로는 삼성그룹이 1276.91%로 가장 높다.

SK그룹(1200.14%)과 롯데그룹(1041.87%)이 뒤를 이었다. 다음으로 △현대중공업(892.73%) △한진(791.51%) △현대차(533.10%) △GS(461.11%) △LG (355.79%) △한화(213.87%) △두산(136.26%) 순이다.

10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LG그룹은 잉여금이 줄어들면서 유보율이 10.67%포인트 낮아졌다.

기업별로는 태광산업이 2만5846%로 유보율이 가장 높다.

○ 마땅한 투자처 없어

유보율이 높다는 지적에 기업들은 자칫 ‘투자를 하지 않는 기업’으로 비칠까봐 은근히 신경 쓰는 눈치다.

10대 그룹 가운데 가장 유보율이 높은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재무담당 관계자는 “삼성은 그동안 투자를 가장 활발하게 해 온 기업”이라며 “유보율이 높아진 것은 투자를 안 했다기보다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K그룹 권오용 기업문화실장(전무)은 “그룹 유보율이 높은 것은 주요 계열사인 SK텔레콤이 잉여금(10조5293억 원)에 비해 자본금(446억 원)이 워낙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보율 1위 기업인 태광산업은 “자본금(56억 원)이 적기 때문에 나오는 통계”라며 “그동안 케이블TV 사업 등에서 왕성한 인수합병(M&A)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다는 데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예전처럼 대규모 자금을 투자할 만한 신규 사업 아이템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LG그룹 재경팀 관계자도 “예전처럼 신사업에 대한 사업 기회가 많지 않다”며 “투자를 하려면 적당한 사업 아이템을 찾아야 하고 내부 역량도 있어야 하는데 우리한테 딱 맞는지 안 맞는지 장담을 못 한다”고 말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많은 현금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주우식 삼성전자 IR팀장(전무)은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우량 기업은 수십조 원의 현금을 들고 있다”며 “요즘처럼 제품 사이클이 짧고 불확실한 경영 여건에서는 내부 보유 현금이 톡톡한 비상금 효과를 낸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9월 말 현재 5조2000억 원가량의 현금을 갖고 있다.

○ ‘정부 정책이 불확실하니까…’

기업은 번 돈을 투자를 해야 다시 새로운 동력을 창출하고 계속 커 나갈 수 있다.

돈을 그냥 움켜쥐고 있다가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등 주가를 부양하는 데 써 버린다면 향후 10년, 20년 뒤 회사 미래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미래 가치를 위한 투자가 적어지면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고 하루하루 먹고사는 데에만 급급하게 된다.

기업이 투자에 소극적인 것은 불확실한 정부 정책과도 연관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홍익대 김종석(경제학) 교수는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현상은 현 정부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며 “각종 규제와 함께 정책이 수시로 바뀌어 기업들이 미래를 불확실하게 보기 때문에 투자에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승철 경제조사본부장(상무)은 “기업이 열 번 잘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몰매 맞는 분위기가 돼 있다”며 “정부 정책이 일관성 없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유보율

기업이 영업활동과 자본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잉여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비율. 이 수치가 높으면 재무 구조가 탄탄하다는 뜻이지만 기업들이 투자할 곳을 마땅히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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