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사원들에게 수백억대 특혜…공기업 ‘도덕적 해이’

  • 입력 2005년 10월 7일 03시 06분


코멘트
《지난달 2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김태환(金泰煥) 의원실 앞에서 한국철도시설공단 직원들이 몇 시간째 김 의원 보좌진과 언쟁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본사를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전한 이 공단이 거주지가 달라지지도 않은 직원 682명에게 공공 주택을 편법 공급하기로 한 내부 방침을 김 의원이 다음 날 국정감사에서 폭로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급기야 한 직원은 “서울에서 대전으로 옮긴 직원들에게만 주택을 공급하면 노조에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다 주려 한 게 뭐가 잘못됐느냐”고 주장했다. 김 의원의 보좌관 A 씨는 “공기업들의 인식이 일반인과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공기업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높다. 특히 일부 공기업의 제 식구 챙기기와 예산 낭비는 수년 동안 국감과 감사원 감사에도 불구하고 반복되고 있어 도적적 해이가 상습화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반복되는 방만 경영

지난달 26일 국감에서는 한국도로공사가 수년간 퇴직 사원들에게 수백억 원대의 특혜를 제공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도공은 지난해 새로 지은 고속도로 휴게소 11곳과 주유소 9곳의 운영권을 한도산업에 수의계약으로 넘겼는데, 이 업체는 도공의 전현직 임직원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도성회가 지분 100%를 갖고 있다. 자신들이 발주한 사업의 핵심 이권 사업을 ‘자기 식구들’이 챙긴 것.

도성회 특혜 의혹은 2001년부터 수차례 국감 등을 통해 제기됐다. 2003년 9월 당시 민주당 김영환(金榮煥) 의원은 도공 국감에서 고속도로 휴게소 10곳과 주유소 14곳을 한도산업이 운영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나 2년 동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감사원이 6일 밝힌 9월 예비조사 과정에서는 국책은행들이 본업을 방기한 점이 드러났다.

산업자금 공급을 주업무로 하는 한국산업은행의 장기 기업 대출은 1997년 47조 원에서 2004년 31조 원으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단기 회사채 발행은 8조5000억 원에서 41조 원으로 5배로 늘었다. 산은이 국책은행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올해 5∼8월 발행된 총회사채 13조5000억 원 중 25%(약 3조5000억 원)를 독식했다는 게 감사원의 지적이다.

한국전력공사는 감사원의 지속적인 시정 권고에도 불구하고 2001년 4월부터 민간 기업에 대한 물품 대금(총 3조 원)을 60일 만기 어음으로 지급한 반면 발전자회사의 전력거래대금(47조3000억 원)은 현금으로 지급해 온 것으로 7월 감사원 감사 결과 밝혀졌다.

민간 기업들이 어음을 현금화하려면 할인수수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이들 업체가 2001년 이후 한전의 어음을 받고 추가로 부담한 금융비용만 131억 원에 이른다.

●나만 배부르면 된다?

기업 경영 여건이 나쁠 때도 파격적으로 임금을 인상하고 사원들의 복지를 챙기는 것은 공기업 도덕적 해이의 단골 메뉴다.

감사원의 예비 조사 결과 공적자금이 투입된 B은행의 회장 겸 사장은 연봉 12억 원을, C은행 총재는 8억 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공기업 D사의 하위직은 중앙부처 1급 공무원보다 많은 연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건설교통부 산하 4대 공사인 대한주택공사, 한국수자원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토지공사는 매년 국감 때마다 과도한 부채부터 우선 갚으라고 지적받으면서도 1990년 이후 15년간 수천억 원대의 사내복지기금을 출연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김 의원이 6일 이들 4개 공사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이들 공사는 지난달까지 최소 3382억 원의 사내복지기금을 적립했다. 토공이 1097억 원으로 가장 많은 기금을 출연했고 수자원공사 1009억 원, 주공이 773억 원, 도공이 503억 원을 지금까지 출연했다. 이들은 복지기금 원금에 대한 이자만으로 직원들의 복지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음에도 올해만 수백억 원대의 기금을 추가 출연했거나 할 예정이다.

●감사만으로 해결될까

매년 국감이나 감사원 특감을 통해서도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이 끊이지 않는 것은 ‘낙하산 인사’로 정치인 등 비전문가가 기관장이나 감사로 내려가 내부통제시스템이 거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특히 현 정부는 출범 후 공기업 민영화 대신 자체 혁신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지만 정권의 ‘논공행상’식 인사로 공기업 개혁을 위한 최소한의 틀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

심지어 이번 감사원 특감도 공기업 도덕적 해이에 대한 여론 악화를 잠재우려는 시도 중 하나라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정치권 인사 61명이 정부 산하기관이나 관련 기관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이들 가운데 21명(34.4%)이 사장, 이사장 등 최고위직이었고 9명이 상임이사 부회장, 부사장 등을 맡았다. 나머지 31명은 각 기관의 감사를 꿰찼다.

열린우리당 출신으로 한 공사의 감사로 있는 P 씨는 최근 기자에게 “출근해서 주로 신문 보는 게 내 일”이라며 “오랫동안 정치권에 있으면서 아내에게 제대로 된 월급봉투를 주지 못했는데 요즘은 꼬박꼬박 갖다 주니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P 씨의 연봉은 1억 원이 넘는다.

공무원 출신 기관장이나 감사도 82명에 달해 공기업 인사는 정부의 ‘회전문 인사’라는 지적이 나온 지도 오래다.

연세대 이종수(李鍾秀·행정학) 교수는 “공기업의 구조적인 방만 경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직원 및 조직을 개혁할 수 있는 인사가 필수적”이라며 “정권 차원에서 정치권 인사와 고참 관료들을 배려하는 공기업 인사 체계를 우선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