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층자산 국외로 “세금 늘고 눈총 받느니 차라리 해외로…”

  • 입력 2004년 5월 19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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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투자인가, 재산도피인가.’ 일부 부유층을 중심으로 재산을 해외로 옮기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이

부유층 전반으로 확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졌

다는 게 은행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반(反)부자 정서에다 정치사회적 불안, 부유세 신설 논의 등으로 부유층의 불안심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이런 가운데 외국인투자자들도 한국 시장에서 자금을 빼는 추세여서 부유층의 재산 반출이 본격화 될 경우 경기침체는 물론 성장잠재력 훼손이 우려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부유층의 투자와 소비를 이끌어 낼 대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일본을 자주 방문하는 사업가 J씨(37)는 이달 초 1억5000만원으로 원룸형 맨션 한 채를 사려고 도쿄(東京)의 부동산업자를 찾았다가 입이 딱 벌어졌다.

‘코리아 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영업하는 재일교포 부동산업자는 “요즘 한국에서 부동산을 사러 일본에 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면서 “지난 한달간 10억원대 부동산 4건을 팔았고 신도시인 시오도메(汐留)에 빌딩을 알아봐 달라는 주문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일본에 가져오느냐”는 J씨의 질문에 부동산업자는 수수료 2∼3%를 받고 무역업체를 통해 자금을 송금해 주는 브로커까지 ‘친절하게’ 소개해줬다.

은행의 부유층 고객 담당자들에 따르면 한국에 있는 재산을 해외로 빼내거나 아예 모두 챙겨 이민을 가는 부유층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해외로 떠나는 부유층 늘어난다=A은행 서울 강남구의 한 지점장은 최근 40억원대 자산을 보유한 60대 고객이 은행에 맡긴 돈을 모두 찾아가려고 해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평생을 의사로 일하고 부동산 투자로 재산을 불린 이 고객은 지난해 말 캐나다 이민허가를 받아 올해 안에 한국을 떠날 계획. 이미 대부분의 자산을 정리했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서울 강남의 20억원대 건물도 처분하기 위해 내놓았다.

그가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요즘 사회적 분위기에서 부자라는 이유로 욕먹기도 싫고 벌어 놓은 돈을 마음 편히 쓰고 싶다”는 것. 이곳 지점장은 “국내에 자산을 놔두고 해외펀드 등에 투자하는 방법 등을 권유해 봤지만 ‘단순히 돈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고 말했다.

B은행 고위 관계자는 “올해 들어 매달 50억원 이상 거액 자산가 고객들의 이민이 20여건씩 보고 돼 대책을 마련하는 중”이라며 “이는 예년보다 갑절 이상 늘어난 것으로 특히 ‘벼락부자’가 아니라 수십년간 고액을 맡겼던 ‘전통적 부자’라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외국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교포들이 부동산 예금 등의 국내 자산을 처분해 국외로 가져간 ‘해외교포 재산 반출액’은 지난해 9억5480만달러였다. 이는 3년 전인 2000년의 6970만달러에 비해 13.7배로 늘어난 것.

▽자산가들 해외투자 열기=“자산가들의 포트폴리오(재산배분)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에 ‘주식, 부동산, 채권’에 분산투자했다면 이제는 ‘한국, 미국, 호주’ 식으로 배분한다.”

C자산운용사의 고위 관계자의 얘기다. 저금리, 불안한 주식시장, 강화되는 부동산 관련 과세 등을 고려할 때 한국에 재산을 몰아두는 것은 투자의 ‘수익성’과 ‘안정성’ 모두 위협받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해외 부동산 시장에서 한국인들의 투자열기도 높아지고 있다.

포스코건설이 미국 하와이에 짓고 있는 아파트 ‘나인 오 나인 카피올라니’는 국내에 전혀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도 한국인 수십명으로부터 분양문의를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국 시민권이 있는 친척이나 현지 한국법인을 통해 실제로 분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SR개발이 중국 선양에 짓고 있는 5000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에는 단지 내 상가에 병원을 열면서 투자를 겸해 분양을 받으려는 한국인 의사들이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자산가들이 자녀들을 해외유학 보내는 이유도 ‘국제 포트폴리오’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유학생 1인당 연간 10만달러까지 허용되는 유학생 송금과 가족에게 보내는 증여성 송금이 합법적으로 자산을 빼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

일부 자산가들은 거액의 자산을 해외로 빼내기 위해 탈법은 물론 편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한다. 한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주로 해외에 현지법인이나 지사(支社)를 세워 거래액을 속이는 방법을 쓰고 있다. 브로커를 이용한 ‘환치기’ 수법도 자주 적발되고 있다.

아내와 대학생 자녀가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는 중견기업인 K씨는 “미국에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를 세워 회사 명의로 300만달러짜리 주택을 사고 아내를 직원으로 등록시켰다”면서 “세금을 잘 내면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따는 데도 유리하다”고 말했다.

▽투자처는 없고 세금은 늘어나고…=최근 한국의 경제, 사회적 상황은 이들 자산가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주식시장은 불안한 행보를 보이고 정기예금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정부는 개발이익을 환수하기 위해 2005년부터 부동산에 종합과세를 할 계획이며 재산세 등 보유세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고소득층을 겨냥한 부유세 신설 논의가 진행되는 등 세금부담이 계속 커지고 있는 것.

D은행의 프라이빗뱅킹 담당자는 “아직까지는 ‘차라리 해외로 가버리고 싶다’고 말은 해도 실제로 한국을 떠나는 자산가는 많지 않다”면서 “하지만 최근 자산가들 사이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과 탈출 욕구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연구위원은 “지금처럼 개방이 진행된 상황에서는 자산가들에게 ‘도덕적 책임감’을 강조한다고 해도 이들이 자산을 해외로 빼내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다”면서 “자산가들의 자산 해외이전은 이미 침체된 투자와 소비를 더욱 위축시킬 수 있는 만큼 이들의 불안심리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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