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5월대란 오나]정부 ‘눈먼 돈 퍼주기’ 부실 키웠다

  • 입력 2004년 3월 22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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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IT) 관련 벤처기업 A사의 김철수 사장(가명)은 요즘 ‘프라이머리 CBO’란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2001년에 지원받은 50억원의 만기가 8월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A사는 지난 5년간 꾸준히 연간 매출액 250억원을 달성했고 매출액 중 4∼5% 안팎에서 흑자를 냈다. 작년 경상이익은 9억원이었다. 하지만 50억원을 한꺼번에 갚기는 역부족이다. A사는 이미 은행에서 매출 및 이익을 담보로 100억원가량 대출을 받았다. 대출받은 돈은 시설자금이나 운전자금으로 소진했다. 대출금을 매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는 상황이라 50억원을 새로 빌리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김 사장은 그래도 은행 창구를 다시 찾았다. 하지만 “담보 없이는 대출이 불가능하게 된지 오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A사는 건물을 갖고 있지 않다.

코스닥에서 증자(增資)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요즘 같은 시장 상황에서는 꿈같은 일이다.

김 사장은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회사뿐 아니라 당시에 프라이머리 CBO를 갖다 쓴 업체는 대부분 비슷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벤처 프라이머리 CBO의 만기가 올해 5월부터 도래하면서 A사와 같은 우량벤처기업도 도산 위기를 맞고 있다. 벤처업계는 프라이머리 CBO 만기도래와 은행권 대출심사 강화, 코스닥 시장 침체라는 삼각파도를 맞아 ‘벤처 대란(大亂)’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연쇄 도산이 예상되는 벤처업체=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프라이머리 CBO의 금액은 원금에 대한 이자까지 합쳐 2조3000억원. 여기에 보증을 서준 기술신용보증기금은 요즘 속이 탄다.

전종순(全鍾淳)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는 “지난해 7월부터 15명의 프라이머리 CBO 전담팀을 구성해 업체들에 대해 실사(實査)를 벌여 6255억원은 돌려받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됐다”면서 “경기 상황에 따라 손실액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크게 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벤처업계의 실상을 보면 상황은 기술신보의 예상과 크게 다르다. 상대적으로 우량한 벤처기업도 부도를 피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벤처캐피털을 운영하는 박모씨는 “상환자금 마련을 위해 벤처기업 사장과 재무담당자들이 사채시장까지 기웃거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면서 “이대로 가다간 첫 만기가 돌아오는 5월부터 문 닫는 기업이 속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5월에 15억원을 갚아야 하는 B벤처기업 관계자는 “상환금을 마련하지 못해 감자(減資) 후 증자를 하려 하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벤처업계는 이 때문에 정부의 지원책 발표만 목 타게 기다리고 있다. 기술신보는 이번 주 중 보증을 서준 기업들의 재무상태를 파악해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에 보고할 예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기술신보 관계자는 “현실적으로는 일단 기술신보가 먼저 투자자들에게 전부 갚아준 뒤 재정에서 지원을 받아 새로 보증을 해주는 방법밖에 없다”면서 “하지만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예고된 정책 실패=이번 벤처기업의 위기는 이미 예고된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모 신용평가회사 관계자는 “2001년에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우량업체였지만 신용등급은 대부분 투자 부적격인 ‘싱글B’ 이하였다”고 지적했다.

지원을 받은 업체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도 심각한 문제였다. 지원금에 특별한 사용처 제한규정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스닥 등록업체인 C벤처기업의 사장은 “당시 벤처기업인들 사이에 프라이머리 CBO 지원금은 정부가 주는 ‘눈먼 돈’이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면서 “일부 벤처기업인은 이 돈으로 개인 빚을 갚거나 접대를 위한 술값에 쓰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또 지원받은 업체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주체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도 부실을 키운 원인으로 지적된다. 반도체 관련 벤처기업인 D사는 “3년간 한 번도 실태조사가 없다가 최근 만기가 다가오자 1∼2시간 기술신보 담당자를 만나 조사에 응한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구조조정의 계기로 삼아야=바이오분야 벤처캐피털리스트인 이모씨는 “지금은 기술과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이를 창업으로 연결시킬 수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김대중 정부가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며 자금만 지원했을 뿐 벤처기업의 수익성과 경영능력을 키우고 이를 감시할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벤처기업을 구조조정하고 창업 시스템도 개편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승창(柳承昌)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코스닥 시장마저 망가진 상태라 벤처기업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하지만 벤처기업의 옥석을 가려 연착륙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할 것”이라며 “최근 벤처캐피털은 다소 숨통이 트이고 있는 만큼 창업지원제도 등을 다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허진석기자 jameshuh@donga.com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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