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한국농업]구조조정 미루면 가격경쟁력 회복불능

  • 입력 2003년 9월 16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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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결렬 되면서 농업 구조조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달 초 전국농협조합장들이 서울 서초구 농협유통광장에서 WTO에 공정한 농업협상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결렬 되면서 농업 구조조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달 초 전국농협조합장들이 서울 서초구 농협유통광장에서 WTO에 공정한 농업협상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결렬됐지만 농업 개방에 대한 한국의 불안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하개발어젠다(DDA) 스케줄에 따르면 내년 말까지는 협상이 끝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무역의존도가 큰 한국이 끝까지 이를 거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특히 대폭적인 관세 인하 등 한국에 불리한 내용이 많이 담긴 농업부문 초안(13일 발표)은 앞으로 협상의 토대가 된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국내 농업전문가들은 “농업 개방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봐야 하며 한국 농업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구조조정만이 살 길=현재 한국 농가의 평균 경작 면적은 가구당 1.45ha(1ha는 3000평). 일본(1.57ha)이나 대만(1.2ha)과는 비슷한 수준이지만 대규모 기계 영농을 하는 미국(120ha)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산 쌀값(80kg 기준으로 16만7720원)이 미국산(4만4448원)보다 4배 가까이 비싼 것도 이 같은 영세성 때문이다.

이에 따라 농림부는 주곡(主穀)인 쌀에 대해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을 6ha 수준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최소한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것.

이를 위해 전체 농가의 60.7%를 차지하는 1ha 미만의 영세농 중 상당수를 퇴출시키고 2010년까지 대규모 벼 농가 7만가구가 전체 논의 절반 수준인 42만ha(농가당 평균 6ha)를 보유하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유도 방식은 대규모 농가가 소규모 농가의 논을 임차하도록 하거나, 농지매입 농가에 농지구입자금을 장기저리로 빌려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퇴출되는 농민들에 대한 대책이 충분하지 않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어 시행 과정에서 난항이 예상된다.

▽‘틈새시장’을 노려야=국산 농산물 가운데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품목이 적지 않다. 실제로 사과나 배 등 과일류나 화초 등은 지금도 일본이나 대만 등으로 수출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또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농약을 치지 않은 고급 유기 농산물 수요가 꾸준하게 늘어나는 등 틈새시장도 많은 만큼 특화된 농법으로 한정된 수요층을 공략하는 것도 한국농업의 생존전략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최세균(崔世均) 연구위원은 “오랜 기간 선박으로 운송되는 외국산 농산물은 아무래도 국산 농산물보다 신선도나 안전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농업 개방을 기회로 이용하는 적극성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쏟아 붓기 식’ 농업지원책은 이제 그만=1994년 이후 지난해까지 농업 부문에는 71조8000억원의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됐다 .

하지만 농업예산이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구조개선 사업에 쓰이기보다는 농가 부채탕감과 소득을 보전하는 선심성 예산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많다. 이 때문에 정작 경쟁력을 높이는 데 필요한 농업시설 투자나 유통개혁 같은 구조개선용 예산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실제로 농가 빚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예산과 양곡지원 등에 들어가는 비(非)구조조정용 예산은 올해 기준으로 4조원인 반면 생산기반 조성과 농업인 육성 등 구조조정 예산은 2조5000억원에 불과하다.

▽있는 밥그릇도 제대로 못 찾아먹는 농림부=정부는 1994년 5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직후 피해를 볼 농업 분야 지원을 위해 10년간 15조원을 걷는다는 목표로 농어촌특별세를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주무부처인 농림부가 2001년 말까지 직접 사용한 농특세 예산은 42.8%에 불과하다. 행정자치부가 생활용수 개발용으로, 건설교통부가 오지 및 낙도 교통지원용으로, 교육인적자원부가 실업계 고교학과 개편 등에 농특세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농림부는 내년 6월 말 이후 부과 기간이 10년간 연장될 예정인 농특세를 농업 분야에만 쓰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관계 부처 반발 때문에 농림부 의지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발목 잡는 정치권=농업 분야에서 정치권의 압력을 배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표밭’인 농촌지역의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국익을 생각하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농업 개방 문제가 경제 문제가 아닌 정치 문제로 비화돼 농업 구조조정이 늦춰지는 일도 많았다.

농림부 당국자는 “어차피 개방을 해야 한다면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살릴 것만 살려야 한다”며 “정치권의 이해관계 때문에 구조조정을 게을리 하면 현재의 ‘사탕’이 나중에는 ‘독’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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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차지완기자 cha@donga.com

▼선진국에서는…▼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 농산물 가격 하락, 농업소득 감소, 농민 노령화 등의 문제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겪는 공통된 현상이다. 실제 2001년 말 현재 국제 곡물가격은 1996년과 비교할 때 쌀은 37%, 보리가 32%, 옥수수가 42%, 콩은 38%나 떨어졌다. 또 94년과 비교한 2000년 각국의 가구당 농업소득은 미국이 4377달러에서 2598달러로 40%나 줄어든 것을 비롯해 일본이 32%, 영국은 36.2% 감소했다.

이에 따라 곡물 수출국인 미국과 호주는 물론 유럽 각국과 일본 등의 농촌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하지만 최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서도 드러났듯이 선진 각국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농업 개방에 느긋한 편이다.

이유는 UR 이후 꾸준한 농업 구조조정을 해 왔기 때문. 구조조정의 큰 줄기는 농산물 가격지지를 농촌 개발 투자로 보완하는 정책과 정부의 개입을 축소하는 방안으로 요약된다.

일본의 경우 농산물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올해 농산물 제조와 공급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역(逆)추적 시스템’을 도입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라는 구호로 대변되는 역추적 시스템은 품질이 떨어지거나 농약 등 유해물질이 적발되면 이를 추적할 수 있는 체계다. 또 기업농 육성을 위해 농업법인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농촌에서 밀려나는 농업인들을 위해 경영소득안정대책을 확립했다.

유럽연합(EU)은 올해 곡물 지지가격을 작년에 이어 5% 추가 인하하는 대신 재정 부담과 농민의 반발을 무릅쓰고 인하분 절반을 현금으로 보상했다. 특히 재고 과잉이 우려되는 보리는 가격지지를 폐지했다. 또 곡물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 경지의 10%를 휴경(休耕)토록 하는 대신 현금보조를 실시하고 있다.

EU는 특히 1년여에 걸친 협상을 거쳐 올 7월 공동농업정책(CAP) 개혁안에 합의해 농업 부문 구조조정의 발판을 마련했다.

개혁안의 핵심 내용은 기존 보조금 지급 조건을 바꿔 증산(增産) 유인을 감소시키는 것. 지금까지 미국과 호주 등 농산물수출국들은 EU의 보조금 지급기준이 생산량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무역구조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EU는 이번 개혁을 계기로 보조금 감축이 추진되고 있는 WTO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에서 농업시장 개방과 관련, 긍정적 방침으로 돌아설 수 있었다.

각국의 농업 구조조정 방안
일본― 2002년 4월 농림수산 정책 개혁 방안으로 ‘식(食)과 농(農) 재생플랜’ 추진(식품 안전, 국민 신뢰 확보, 농업 구조개혁 가속 등 과제 설정)― 2003년 농산물 안전 위해 ‘역추적 시스템’ 도입― 구조개혁 대상 농민 위해 ‘경영소득안정대책’ 수립
유럽연합(EU)― 농산물 가격지지 감축 및 부분 소득보상으로 전환― 농가당 직불 수혜한도 상한(연간 30만유로) 설정, 일정금액 이상 수혜농가(연간 5000유로)는 회계장부 기장 의무화― 현금 지원 조건으로 경지 10% 휴경― 영국, 이탈리아 등은 농업부 기능을 농촌개발로 전환
미국― 농가 소득 안정 위해 예산 증액― 농산물 가격 하락 보전위해 하락액을 정부가 현금으로 지불
자료:농림부

고기정기자 koh@donga.com

▼‘젊은 大農’육성 소득격차 해소 서둘러야▼

제5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결렬로 끝나면서 농업 구조조정에 대한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언제든 협상은 다시 시작되고 개방의 압력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한국에서 농업 구조조정은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혹자는 “농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또 “한국에서는 다수의 영세농 때문에 농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높다. 과연 그럴까. 최근 통계에 따르면 경작규모 3ha 이상인 ‘대농(大農)’은 전체의 6%지만 총경지의 26%를 차지한다. 10년 전에는 총경지의 10%였으니 생산집중이 2.5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영세농이 구조조정의 걸림돌이라는 지적도 오해다. 현재 0.5ha 미만의 농가 비중은 전체의 44%로 농업생산의 주류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차지하는 경지면적은 13%에 불과해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농업 구조조정이 더디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이는 농민이 나이가 들어 도시로 나가 새로운 일자리를 가진다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어느 국가에서든 40세가 넘은 농민 중 전직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선진국은 고령 농민이 은퇴 또는 탈농(脫農)하는 세대교체 과정을 통해 농가의 소득격차를 해소하는 데 주력했다. 시간도 짧게는 100년, 길게는 200년이 걸렸다.

한국의 경제발전 속도는 선진국보다 6, 7배 빠르게 진행됐기 때문에 아직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못해 60세 이상의 농민이 농업인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실정이다.

결국 농업 구조조정은 ‘산업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이고 ‘시간과의 싸움’이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우선 은퇴나 탈농을 고려하는 영세농민에게는 경영이양보조금 등을 통해 생활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세대교체를 촉진할 수 있다. 또 남아있는 농가에 대해서는 농산물 가격이 급락해도 일정한 소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소득목표제도도 도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농가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균일한 품질의 농산물을 생산, 유통시킬 수 있도록 정부와 농협의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환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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