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싱크탱크]<9>한국농촌경제연구원

  • 입력 2003년 8월 5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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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4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 세계 농업동향과 농정 주체의 역할’ 심포지엄. 듣기에도 ‘섬뜩한’, 하지만 ‘너무도’ 냉정한 발언들이 쏟아졌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농가는 부채를 정리한 뒤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

“벼 수매제도는 농가 소득에 별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핵심 브레인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세익 농업관측정보센터장, 이재옥 선임연구위원, 장우환 산림정책연구실장, 서종혁 농림기술관리센터소장, 김정호 선임연구위원, 허길행 부원장, 이정환 원장, 박성재 농정연구센터장, 오내원 농촌발전연구센터장, 김명환 농산업경제연구센터장. 이훈구기자

‘차가운 머리’로 세상을 재단하는 경제학자의 말이라면 절반 정도는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농경연)의 수장(首長)인 이정환(李貞煥) 원장의 주장이다.

농경연이 어디인가. 누가 뭐라 해도 농민을 위한 연구집단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곳이 아닌가.

“한쪽에는 농민과 농민단체, 다른 한쪽에는 정부와 국제조약이 버티고 있습니다. 욕먹는 것으로 끝날 농촌 문제라면 한쪽 논리만 잘 들어주면 되지요. 하지만 호랑이 입처럼 버티고 있는 게 농촌을 둘러싼 현실입니다.”

이정환 원장은 농촌 현실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히는 농경연의 현주소다.》

▽그래도 흙에 살리라=1980년대 초 농경연의 주요 연구 분야는 농업 생산성 향상과 농산물 가격 지지였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에는 농외(農外)소득 증대와 주거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여기까지는 농경연이 농촌과 농업을 위한 연구기관으로서 훌륭히 역할을 수행해 냈다. 농민과 농민단체가 농경연을 ‘내 편’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 시기에 맺은 끈끈한 동지애(同志愛) 덕분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농업 구조조정이 주요 연구 대상이 됐다. 우루과이라운드(UR), 도하개발어젠다(DDA) 등 한국 농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파도가 몰아닥친 때문이다.

이 원장이 부실 농가 퇴출과 벼 수매제도 폐지 등을 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농민과 농민단체들은 “너희가 농촌을 배반하느냐”며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농민을 다독거리려 하면 이번에는 정부가 “너희가 농민단체냐”며 꼬집는다.

농경연은 스스로를 농촌에 닥치는 위기를 미리 알리는 메신저로 정의한다. 중립적이고 냉철한 연구자의 기능을 다짐하는 것이다.

박성재(朴成在) 농정연구센터장은 “더 이상 정부나 연구기관이 농업에 희망이 있다고 농촌을 부추기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대신 진정 농업을 가슴으로 사랑하고 과학적인 경영 기법을 적용할 수 있는 젊은 피가 수혈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업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인 경영 기법이라…. 이렇게 말해놓고는 천장을 쳐다보는 그에게서 차가운 과학보다 따뜻한 가슴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농경연의 연구위원은 냉혹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지만, 그래도 농촌은 흙을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야 한다고 되뇌는 것은 아닐까.

▽농촌 연구의 마지막 지킴이=역설적이게도 농촌이 어려워지면서 농경연의 역할은 더 커졌다. 농경연의 대체재라 할 수 있는 각 대학의 농업 관련 학과와 민간 연구소가 갈수록 줄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사도 많다. 전체 인원 119명 가운데 박사학위 소지자만 61명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박사 수가 30∼40여명이다. 외환위기 당시 40여명 선으로 줄었지만 다시 늘었다.

업무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연구위원마다 1년에 4, 5건은 용역을 반려시킬 정도다. 일부에서는 78년 개원한 뒤 업무량이 가장 많아졌다고 푸념도 한다.

연구 분야는 크게 △농산업경제 △농촌 발전 △농업관측정보 △농정(農政) △북한농업 △산림정책 △농림기술관리 △벤처농기업 창업보육 △대외협력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농업관측정보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뒤 26개 농축산물의 수급(需給)을 예상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OO파동’이 많이 줄어든 것도 이 덕분이다.

농림기술관리는 별도의 센터를 설립해 지원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평가에서 99년부터 3년 연속 ‘A’등급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농경연의 브레인=이정환 원장은 박사학위를 딴 이후 줄곧 농경연에서만 일해 온 농경연의 산 증인이다. 농림부 장관 교체 때마다 ‘0순위’ 후보로 거론됐다.

지난달 김영진(金泳鎭) 전 농림부 장관이 ‘새만금 파동’으로 그만뒀을 때에도 유력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나라를 위해서는 제가 연구직에 있어야 합니다”라며 정중히 사양하곤 했다.

허길행(許吉行) 부원장은 농협 전문가다. 91년 단위조합 합병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당시 공교롭게도 농림부도 내부적으로 이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뛰어난 통찰력을 인정받았다.

서종혁(徐鍾赫) 농림기술관리센터 소장은 기술 분야를 총괄 관리한다. 개인적으로는 농외소득과 농촌개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동필(李桐弼) 기획조정실장은 ‘아이디어 뱅크’다. 농촌정보화, 신상품 개발 등의 선구자로 통한다. 1차산업인 농업에 농산물 가공업(2차산업)과 생태 관광(3차산업)을 접목하는 ‘6차산업론’(1차+2차+3차)을 주장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명환(金明煥) 농산업경제연구센터장은 농촌에 가장 민감한 쌀 문제의 전문가다.

오내원(吳乃元) 농촌발전연구센터장은 경작을 하지 않는 대신 직접 돈을 주는 직불제 연구의 권위자다. 연구원 안에서는 차세대 핵심 두뇌로 꼽힌다.

오세익(吳世翼) 농업관측정보센터장은 탁월한 업무 추진력이 강점인 행정가형 학자로 통한다. 맡은 분야마다 어떻게든 정부로부터 예산을 따내 본인이 기획한 대로 업무를 성사시키고야 만다는 평가.

박성재 농정연구센터장은 농가 부채를 주로 연구한다. 심성이 곧고 농업에 대한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어 원내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

장우환(張宇煥) 산림정책연구실장은 산지(山地)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한다. 경제림 조성, 산림휴양 개발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정명채(鄭明采) 선임연구위원, 박대식(朴大植) 연구위원, 최경환(崔景煥) 연구위원은 최근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농촌 복지 분야의 3총사, 권태진(權泰進) 연구위원과 김영훈(金永勳) 부연구위원은 북한농업 연구에서 독보적인 기반을 쌓아가고 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農經硏 출신 행정부-학계 등 곳곳서 '한몫' ▼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행정부와 학계의 인재 양성소 역할도 맡아왔다. 대학 교수는 물론 장관과 대사 등을 배출했다.

허신행(許信行) 전 원장이 대표적이다. 연구원에 1978년부터 93년까지 몸담은 뒤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연구원장이 장관으로 옮겨 오기는 농림부로서는 처음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농림부 직원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처음의 우려와 달리 추진력이 겸비된 ‘카리스마’와 논리력, 농업 현장에 대한 이해로 조직을 잘 장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3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수석대표로 참가했다가 쌀 시장 개방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의 이임사 첫 마디인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가 봅니다”는 두고두고 회자(膾炙)됐다.

농림부에서는 지금 같으면 나름대로 잘했던 협상으로 인정받겠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누구라도 ‘역적’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 있다.

김영진(金榮鎭) 전 원장도 연구원 출신으로 농업기반공사의 전신인 농어촌진흥공사 사장과 초대 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6대 원장인 정영일(鄭英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농정연구포럼 이사장, 농업경제학회장 등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경제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농업에 대한 이해가 밝아 농림부 장관 후보로 꼽혀왔다.

최양부(崔洋夫) 주아르헨티나 대사도 90년부터 4년간 부원장으로 재직했다. 현 정부 조각 때 유력한 농림부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현재 농림부 농업통상정책관인 최정섭(崔正燮) 박사도 연구원 출신으로 탁월한 대외 교섭력과 폭넓은 시각을 인정받고 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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