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개인금융정보 마구잡이 요구

  • 입력 2003년 5월 18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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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은행의 금융정보 자료제공 현황
자료요청 접수문서건수
2001년 3·4분기4,300
4·4분기4,600
2002년 1·4분기5,000
2·4분기5,600
3·4분기 5,200
4·4분기 4,700
자료요청 접수 문서 한건에 여러 개의 자료요청이 있을 수 있음.

《K씨(38·자영업·서울 강남구 청담동)는 얼마 전 거래은행이 보낸 등기우편 한 통을 받았다. “모 정부기관의 요청으로 작년 5, 6월에 이뤄진 입출금과 송금내용을 제출했다”는 내용이었다. K씨는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럴까’라며 기억을 더듬어 통장을 살펴봤지만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었다. 은행에 문의한 결과 K씨와 사업관계에 있는 한 사람의 위법행위가 적발돼 그와 연관된 사람의 계좌가 모두 조회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K씨는 “정부기관이라고 해서 어떻게 국민의 금융계좌를 함부로 뒤질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

정부의 무차별적인 금융거래 자료요청으로 철저한 비밀이 보장돼야 할 국민의 금융정보가 마구잡이로 새나가고 있다. 범죄수사나 연체세금 환수 등 법적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자료요청이 남발되고 있는 것.

정부기관의 이 같은 금융거래 자료요청은 연간 300만건이 넘는다. 국민의 금융정보가 보호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도 은행 부담이다.

▽나도 모르게 돈이 빠져나간다=L씨(38)는 얼마 전 A은행 계좌에 남아있는 돈을 찾으려다 한 푼도 없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창구에 물어보니 사정은 이랬다. 3월 말 A은행의 한 영업점 앞으로 L씨의 예금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요구 신청서가 도착했다. L씨가 자동차세 14만250원을 체납하고 있기 때문.

A은행은 정보요청을 한 구청에 L씨 명의의 계좌에 12만2800원이 있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은행은 또 L씨의 예금계좌를 지급정지시키고 예금 잔액을 지자체 계좌로 이체했다.

L씨는 “바쁜 일과로 제때 세금을 못낸 나도 잘못이지만 자치단체가 무차별적으로 개인 신용정보를 이용한다면 어떻게 사생활이 보장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느냐”며 “공무원들이 입수한 개인 금융자료가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간다면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어이없어 했다.

▽금융정보가 마구 새나간다=작년 12월 우리은행 K지점장은 모 정부부처가 지방세 체납자 1만명의 금융정보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거절했다.

“1만명의 금융거래내용을 파악하려면 지점이 한 달간 문을 닫고 전 직원이 매달려야 합니다. 저희 지점으로선 도저히 해드릴 수 없습니다.”(K지점장)

“금융거래 제공요구는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입니다. 정보제공 요청을 거절하시면 법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기관 담당자)

“체납액이 적은 사람들은 제외하고 고액체납자 1000명 정도만 조사하는 것이 어떨까요. 몇 만원의 세금체납 때문에 개인의 금융정보가 통째로 공개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K지점장)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해왔는데 왜 그러세요. 다시 1000명을 추려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일단 다 보내주세요.”(기관 담당자)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따르면 15개 국내 은행이 2001년 7월∼2002년 6월 정부기관에 제공한 정보는 310만2000여건, 우편물 발송비만 해도 60여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B은행은 작년 6월 모 기관으로부터 10만건의 금융거래정보 제공을 요청받았다. 이에 따라 전산팀 전 직원이 한 달간 이 업무에만 매달려야 했다.

은행측은 이러한 사정을 들어 해당기관에 적정수수료를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정부 스스로 법을 지키지 않는다〓현재 법적으로 금융거래 정보요구기관으로 지정된 곳은 법원과 검찰 등 수사기관과 감사원 재정경제부 국세청 선거관리위원회 공직자윤리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 지방자치단체 등 13개다.

문제는 이들 정부기관이 금융정보를 요청할 때 금융실명제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 금융실명제법상 정부기관이 금융거래 정보를 요구할 때는 구체적인 금융거래를 적시하고 직전 거래와 직후 거래만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기관들은 계좌 명의인의 계좌 정보 전체를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검찰 등은 “수사상 필요한 것이니 빨리 달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금감원은 “검사를 위해 필요하니 명의인과 거래를 한 다른 사람들의 계좌정보도 포괄적으로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 금융기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러다보니 잘못이 없는 개인의 금융정보마저 정부기관으로 넘어간다.

서울시청 세무과 남기현씨는 “작년까지는 서울시청이 각 구청의 신청을 받아 일괄적으로 금융기관에 정보를 요구했지만 올 들어 수수료 문제를 놓고 금융기관과 협의를 벌이면서 금융거래 정보 신청을 자제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C은행 관계자는 “정부기관에 몇 만 건의 자료를 전달할 때마다 ‘잘못해서 저 자료가 새나가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닌데’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전했다.

금융연구원 김상환 연구원은 “정부기관의 신용정보 요구는 금융실명제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하며 확보한 정보도 선진국처럼 엄격한 관리와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구호뿐인 '개인정보 보호'▼

금융감독원은 최근 각 금융회사에 공문을 보내 “금감원 직원을 사칭해 금융정보를 부당하게 얻는 경우가 많으니 반드시 신분을 확인한 뒤 대처하라”고 주문했다.

은행 등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금감원 직원을 사칭하며 개인 금융거래정보 자료를 요구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일부 사채업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개인 금융정보를 입수해 e메일로 신용상황을 분석, 대출을 알선해주겠다고 유혹하는 등 악용하고 있다.

금융 선진국들은 이 같은 개인 금융정보 누출 위험에 대해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등 단호하게 대응하고 있다.

미국은 교과과정에 ‘개인 금융정보 보호의 중요성’을 포함시키는 등 어릴 때부터 신용정보에 대해 철저히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신용정보가 중요한 만큼 남의 것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을 일찍부터 몸에 익히게 하고 있는 것.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정책 차원에서 개인과 금융기관들을 대상으로 금융정보를 엄격하게 관리감독하고 있다.

연방정부 차원의 공공신용기록기관(PCR)을 통해 개인의 납세정보를 포함해 0.01달러 이상의 모든 금융거래 정보가 금융기관에 집중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 정부는 공정신용정보법(FCRA) 등을 통해 소비자의 금융거래정보를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독일도 연방데이터보호법에 의해 개인금융정보의 등록과 처리를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법체계에 예외규정이 별로 없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모호한 부분을 없앴다는 것.

한국도 금융실명제법, 신용정보업법 등 관련 법규가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조항에 대한 예외규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워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이다.

특히 민간회사가 개인의 신상정보를 본인 동의 없이 조회하거나 자료를 유통시켜 수익활동에 사용해도 이를 처벌한 만한 법규정이 없다.

이런 제도적 결점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개인의 금융정보는 언제, 어디서든 유출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개인신용평가(크레디트 뷰로) 사업에 뛰어드는 업체가 늘면서 연체정보 등은 물론 금융거래 정보까지 낱낱이 공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의 김석동(金錫東) 감독정책1국장은 “관련법 체계의 정비와 함께 금융계 종사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금융거래 조회통보 수수료 정부기관, 은행에 떠넘겨▼

지난해 9월 서울시와 각 구청은 옛 서울은행 등 7, 8개 시중은행을 사법당국에 고발했다.

지방세 체납자의 자산을 가압류하기 위해 금융거래명세를 요청했으나 은행들이 일제히 “거래명세 조회와 고객에게 관련사실을 통보하는 등기비용을 자치단체가 부담하기 전까지는 응할 수 없다”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양측의 대립은 ‘은행연합회와 서울시가 적정수수료 지급안을 합의한다’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약속시한을 훨씬 넘긴 올해 5월까지도 합의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금융실명제법에 따라 금융회사가 거래명세를 관련기관에 넘겨줄 때는 당사자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려줘야 하므로 은행은 주로 우편을 이용한다.

등기우편 1건당 발송비는 1500원이며 고객이 우편물을 받지 못해 반송되면 은행은 추가로 1300원을 더 내야 한다.

은행연합회 수신팀 지순구 대리는 “반송률이 전체 우편물의 30% 수준이어서 건당 비용은 평균 2000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료를 요청한 정부기관에서는 전혀 수수료를 내지 않고 있다.

A은행은 이러한 금융거래명세 조회 및 우편 통보에 드는 비용이 연간 4억3300만원인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개인들이 은행에서 잔액증명이나 부채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건당 2000∼3000원을 내야 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앞으로 금융거래 조회기관을 더 늘리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은행들의 비용부담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서울시는 “은행의 기본적인 우편발송비용은 지급하겠다”며 한발 물러섰으나 다른 지자체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며 시간을 끌고 있다.

은행연합회는 “우편발송 이외에 직원들의 인건비와 전산가동비 등 건당 500∼1000원의 부수적인 추가비용이 발생한다”며 “이 비용도 지자체가 책임져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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