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진 정부 뒤늦게 허둥지둥

  • 입력 2000년 9월 16일 18시 40분


16일 열린 긴급 경제장관 간담회는 시종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고유가 충격을 추스르기도 벅찬 터에 포드사의 대우자동차 인수 포기라는 메가톤급 악재까지 겹친 탓인지 회의장에 들어서는 경제장관들의 표정은 몹시 굳어 보였다.

2시간15분간의 회의가 끝난 뒤 정부 대책이 발표됐다. 예상대로 재탕식 정책이 대부분. 하지만 유가와 관련해 “이라크와 쿠웨이트간의 분쟁 등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 만큼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하겠다”고 다짐한 대목은 눈길을 끌 만했다.

‘고유가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수정해 정부가 유가문제의 심각성을 비로소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 뒤늦게나마 인식을 전환한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진작 이런 자세로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우리 경제는 주가폭락, 유가급등, 물가불안, 기업자금난, 경기양극화, 대우차매각 차질 등 각종 악재가 전방위적으로 정부 기업 가계 등 경제 주체들을 입체적으로 압박하는 형국.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발등의 불’이 도처에 퍼져 있는 것이다.

경제 전체의 최종 조율자인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대부분 현안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기업과 서민, 투자자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뒷짐지다 번번이 당한 정부〓포드가 대우자동차 인수를 포기할 것이라는 관측은 이달 초 업계와 일부 로펌 관계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포드 자동차의 미국내 대량리콜 선언과 이에 따른 주가폭락으로 대우차 인수여력을 상실했다는 것.

경고성 메시지가 잇따라 정부 실무진에 전달됐지만 정부는 “세계적 기업인 포드사가 그럴 리가 있겠느냐”면서 적극적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상대방의 선의만 믿다가 뒤통수를 맞은 꼴.

포드의 인수포기가 확정된 15일 정부는 대우차 매각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 입장정리가 안돼 하루종일 우왕좌왕했다. 잠재적 인수자인 현대와 GM이 당국자들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즐기는 안쓰러운 장면이 연출됐다.

고유가를 예상조차 못했다가 배럴당 30달러가 넘어서야 허둥지둥 대책을 내놓은 지 불과 2, 3일만에 비슷한 상황이 재연된 것이다.

▽민관 시각차 더 벌어졌다〓주가가 폭락하고 중견기업들이 자금난에 허덕이지만 이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시각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지는 양상.

증시대책에 대해 재정경제부는 “시장 자체가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인위적인 부양책은 부작용만 빚을 뿐”이라며 원칙적 대응을 강조하지만 투자자들은 시장 자체의 붕괴를 걱정한다.

물가불안에 대해 정부측은 “연간 상승률을 2.5% 이내에서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며 저물가 유지를 장담한다. 그러나 지하철요금이 이달 초 슬그머니 인상된 데 이어 유가급등에 따라 전기료와 기름값 등이 줄줄이 오를 예정이어서 체감물가는 이미 높은 수준이다.

현재의 경제상황을 외환위기 직전인 97년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대외 여건만 놓고 보면 그때보다 좋은 점이 별로 없다는 분석. 환은경제연구소 신금덕(辛金德) 동향분석팀장은 “경제 위기감이 고조된 것은 각종 현안에 대한 잇단 정책실패로 인해 정부가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며 “민간의 소리를 겸허히 듣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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