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S BW 가처분결정 의미]재벌 편법상속 제동

  • 입력 2000년 5월 9일 19시 53분


‘법원이 골리앗 대신 다윗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그룹 이건희(李健熙)회장의 자녀들이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팔거나 담보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서울고법의 결정은 재벌가의 편법적인 상속 관행에 제동을 건 첫 결정이란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특히 이번 가처분 결정은 정부가 최근 재벌그룹의 편법 주식증여 조사에 착수하는 등 제2차 재벌 구조조정의 칼을 빼 든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재계가 크게 긴장한 가운데 재벌 기업의 지배구조 조정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법률적 의미〓법원은 ‘겉’으로는 삼성 SDS가 상법 규정을 어긴 절차적 흠을 주로 문제 삼았다. 삼성 SDS가 이재용(李在鏞)씨 등 이회장의 자녀 4명과 이학수(李鶴洙)삼성생명회장 등 최고위 간부 2명이 인수할 BW의 주식 수나 가격을 결정하지 않고 이사회에 포괄적으로 일임한 것은 상법 516조의 규정에 정면으로 어긋난다는 것.

그러나 서울고법이 서울지법 민사합의 50부가 올 2월 내린 “절차적 문제가 없다”는 하급심 결정을 뒤엎은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재벌가의 관행적인 상속 과정의 부당성 및 밀실 결정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법원의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재용씨 등에게 현저하게 유리한 가격으로 낮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즉 재용씨 등이 BW 230만주를 주당 7150원씩 160억여원에 인수해 1000억원대의 재산상 이득을 봤다는 참여연대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7150원은 제3의 회계법인이 최근 3년간 SDS의 기업 경영성과 및 주가 등을 고려해 산정한 것으로 문제삼기 어렵다”며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당시 SDS가 기준으로 삼은 ‘최근 3년’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주가가 폭락하고 영업실적이 바닥을 친 시기로 정상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비판 여론이 높았다.

재판부는 SDS의 투명하지 않은 밀실 결정도 문제삼았다. 삼성 SDS라는 우량기업이 발행하는 BW를 전체 주주들에게 사들일 기회를 주지 않고 밀실 결정을 통해 특정인에게만 기회를 주었다는 불공정성도 가처분을 받아들인 주요 이유의 하나로 고려한 것이다.

재판부가 특히 단 10주를 보유한 소액주주의 권리를 인정한 것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1심 재판부는 “재용씨 등이 BW를 배타적으로 사들였지만 단 10주를 보유한 소액주주에게 피해가 간다고 볼 수 없다”고 다분히 현실론에 입각한 결정을 내렸다.

▽재벌 구조조정의 파장〓법조계와 재계는 이번 결정을 “정부가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구조조정’보다 100배 효과적인 개혁 동인이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부가 아무리 정책수단을 동원해도 ‘몇 년만 버티면…’ 하는 심리가 팽배해 개혁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소속 김진욱(金振旭)변호사는 “재용씨의 BW 매입은 SDS의 자금조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편법 상속을 위해 재벌 오너 가족에게 헐값에 회사 지분을 넘기는 것이므로 용납돼선 안된다”며 “상속을 통해 부가 2대, 3대로 전달되는 관행에 일대 전환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의 끈질긴 투쟁〓97년 한보사건을 계기로 소액주주 운동의 개념을 도입한 참여연대가 재벌그룹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인 성적은 2승2패. 먼저 삼성전자가 삼성물산과 이회장의 장남 재용씨에게 전환사채 600억원어치를 발행한 것을 문제삼은 송사 결과는 ‘가처분 인용, 1심 본안소송 패배’. 김진욱변호사는 “소액주주가 삼성그룹 오너가족을 상대로 싸워 1승을 거둬 소액주주 운동의 가능성을 내비쳤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현재 서울고법에서 재판이 진행 중으로 26일 판결될 예정. 김변호사는 “기업 내부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익명의 내부 고발자의 제보가 재벌을 상대로 한 소송에 결정적인 힘이 돼 왔다”며 재벌 개혁에 ‘시민 참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승련·이완배기자>srkim@donga.com

▼법원 가처분결정 요지

재판기록에 의하면 삼성SDS㈜ 이사회는 삼성그룹의 지배주주인 이건희와 특수관계에 있는 이재용 등 피신청인 6명에게만 신주인수권을 부여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고 이들에게 유리하도록 신주발행가액을 현저히 낮게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주 이외의 제3자에 대해 신주인수권부사채가 발행되면 주주의 재산상 이익이 침해될 수 있고 회사의 지배관계에도 변동을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상법은 신주발행 가액, 신주인수권의 행사비율 등 신주인수권의 내용과 행사기간에 관해 정관의 규정이 없으면 주주총회의 특별결의(출석주주 의결권의 3분의 2와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에 의한 결의)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치지 않은 이 사건 조치가 적법하려면 제3 채무자 회사(삼성SDS)의 정관에 그 사채의 액수, 신주인수권의 내용과 행사기간 등에 관한 구체적이고 확정적인 규정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주발행가격 등 신주인수권의 내용을 구체적이고 확정적으로 정하지 않은 채 이사회에 그 결정을 포괄적으로 일임한 삼성SDS의 정관은 주주의 재산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위 상법 규정에 반한 것이어서 무효다.

주주총회의 특별결의를 거치지 않고 이사회의 결의만으로 ‘신주인수권의 내용’을 결정한 것은 그 발행절차상에 중대한 위법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 사건 가처분신청을 낸 김모씨는 비록 소액주주이지만 그 신청이 그를 포함한 다수 주주들의 계속되는 권리관계에 현저한 손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본안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이 사건 신주인권부사채에 따른 신주인수권의 행사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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