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힘」에 정부 혼쭐…대우구조조정안 금융불안 초래

  • 입력 1999년 7월 28일 19시 35분


‘시장이 정부를 이겼다.’

대우사태를 계기로 경제정책의 ‘주도권’이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 등 정책당국에서 금융시장으로 급속히 넘어가고 있다.

지난 10일간 금융시장의 ‘반응과 그 위력’에 혼쭐이 난 정책당국은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정책은 끝장”이라며 시시각각 시장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갑자기 시장의 힘을 찬미하는 이른바 시장주의자가 많아졌다.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은 28일 강봉균(康奉均)재정경제부장관은 “시장의 신뢰도는 증시를 통해 나타나는 국내외 투자자의 반응과 국내외금융기관의 평가 등 시장이 냉엄하게 결정하는 것”이라며 “대우해법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미흡하지만 정부로서는 잘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시장결정론을 펼쳤다.

재경부 고위관계자는 “모든 문제는 시장원리로 풀어나가야 한다”며 “대우사태 초반에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점이 금융불안을 야기한 것 같다”며 시장의 힘을 간과한 정부의 잘못을 시인했다.

금융감독위 일각에선 ‘시장의 신뢰상실’을 이유로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회장의 경영권을 조기 박탈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정도다. 대우가 그동안 여러 차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경영권’을 내놔야 한다는 논리인 셈.

정책당국자들의 이같은 자세는 대우그룹 구조조정안을 발표하던 19일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시장의 ‘뜨거운 맛’을 봤기 때문이다.

당초 정책당국자들은 금융시장이 대우그룹 구조조정안에 대해 당연히 환영할 것이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대우문제가 이미 금융시장에 충분히 반영돼 있고 구조조정에 대한 정부의지를 확고히 했기 때문에 주가상승 금리안정 등이 뒤따를 것으로 판단한 것.

이에 따라 강봉균재경부장관, 이헌재금감위원장은 금융시장을 배려한 발언보다는 대우그룹을 압박하는데 치중했다. 김우중회장은 퇴진하고 해외부채는 대우그룹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정부와 대우그룹을 신뢰하지 않은 시장참가자들이 곧바로 냉정한 반응을 보이면서 23일엔 사상최대의 주가폭락, 금리폭등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금융기관 등 기관투자가를 상대로 한 정책당국의 ‘윽박지르기’가 거의 통하지 않았고 개인과 외국인투자자들은 더욱 정책당국을 불신하는 결과가 초래됐다.

결국 정책당국은 25일 시장이 요구하는 모든 조치를 내놓으며 금융시장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정책당국은 항복한 다음 시장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초조감 속에 피를 말리는 하루를 보냈다.

26일엔 강봉균장관에게 1시간단위로 주가 금리 환율 분석표를 올리는가 하면 증권제도과는 객장 창구의 분위기를 1시간 단위로 파악하느라 하루종일 분주했다.

〈임규진기자〉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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