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사장 퇴진]정부 초강공 하루만에 「불시착」

  • 입력 1999년 4월 22일 07시 19분


대한항공이 21일 조양호(趙亮鎬)사장의 퇴진을 전격 결정한 것은 “이번에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인 것으로 대한항공 안팎에서는 보고있다.

‘족벌, 세습경영’에 대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질책을 조중훈(趙重勳)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단순한 경고 이상의 무게로 받아들였다는 것. 업계에서는 “대한항공 경영진이 악수(惡手)를 거듭하며 화를 자초한 결과”라는 반응이다.

▽전격 결정 배경〓건설교통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날 “대통령이 그만큼 얘기했으니까 이제 저쪽에서 알아서 하지 않겠느냐”며 경영진 교체의 불가피성을 내비쳤다. 그만큼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뜻. 실제 20일 오후 늦게 건교부의 고위간부가 경영진 퇴진 요구를 대한항공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이같은 재촉에 조중훈회장은 21일 조양호사장을 비롯해 조남호(趙南鎬)한진건설부회장 조수호(趙秀鎬)한진해운사장 조정호(趙正鎬)한진투자증권사장 등 아들들과 기타 그룹사 사장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조회장은 정부의 다각적인 제재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은 대통령의 지적대로 조씨 일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조중훈회장과 다른 아들들의 거취〓조사장의 퇴진이 알려지자 재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라면서도 “조사장이 퇴진했다고 해서 과연 조씨 일가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뗄지는 미지수”라는 반응을 보였다. 조사장이 퇴진하더라도 여전히 대한항공 지분의 25.27%를 보유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마음만 먹으면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사장의 뒤에서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조회장의 거취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점도 이같은 전망을 뒷받침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조중훈회장의 퇴진까지 결정되지 않으면 정부측에서는 절대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건교부 관계자는 “20일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형식적인 경영진 퇴진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안전사고에 책임있는 최고경영자의 영구적인 경영일선 퇴진이 포함돼야 한다는 뜻이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재계 일각에서는 이번 결정에 따라 나머지 아들들의 거취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명했다. 한진그룹이 자의든 타의든 이번 조사장의 퇴진과 맞춰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선언할 경우 한진그룹의 주요 계열사를 나눠맡고 있는 나머지 아들들에게도 화살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화를 자초한 경영진〓대한항공이 잇따른 사고로 조사장의 퇴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내몰린데 대해 업계에서는 “경영진이 화를 자초했다”고 입을 모은다. 조회장과 조사장의 독단적인 경영태도는 대한항공뿐만 아니라 재계 전반에 알려질만큼 정도가 심했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잇따른 사고에 대한 비난이 쏟아져 대한항공이 안전결의 대회를 가졌을 때 조중훈회장이 언론에 한 말은 조회장의 권위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회장은 기자들에게 “이건 그냥 형식으로 하는 것”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문제도 안되는데 언론이 자꾸 떠들어 할 수 없이 연 행사라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조사장 역시 조회장 못지않게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것으로 안팎에 알려졌다. 이같은 권위의식으로 인해 사고가 날 때마다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조회장이나 조사장 모두 다른 쪽으로 책임을 넘기는데 급급했다. 괌사고 때도 부사장을 ‘총알받이’로 내몰아 최고경영자 대신 책임을 지도록 했다.

업계 관계자는 “사고가 났을 때 조회장이나 조사장이 앞장서서 대국민 사과라도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임경영진 향방〓우선 대한항공내 인물 가운데는 대한항공 전문경영인의 투톱으로 불리는 창업 공신 심이택(沈利澤·61)부사장과 이태원(李泰元·63)부사장이 주목받고 있다. 또 다른 대안으로는 회사 성장의 일등공신인데다 대인관계가 원만해 안팎에서 신망이 두터운 조중건(趙重建·68)전부회장의 컴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본격 전환’으로 내세우기에는 미흡하다는게 업계의 분석.

이에 따라 외부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국내에서 항공업체를 전문적으로 경영해온 전문경영인이 전무(全無)하다시피한 것이 현실이다.

〈금동근기자〉gol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