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원재]리큐에게 물어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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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도쿄 특파원
장원재 도쿄 특파원
얼마 전부터 일본 다도(茶道)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 다도의 특징은 다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몇 걸음 걷고 앉을지, 인사는 어떻게 하고 찻잔을 어떻게 들지…. 입문 코스에서 두 달 넘게 배운 끝에 지난 주말 처음 차를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대접했다.

다도는 흔히 일본 문화의 완결판이라고 한다. 건축부터 서예, 그림, 도자기, 꽃꽂이, 의복, 가이세키(정식) 요리, 과자 등이 망라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도를 같이 배우자는 일본인 지인의 권유를 받고 적잖게 망설였다. 한국 다도도 모르면서 일본 다도라니…. 마음을 정한 건 한 편의 소설을 읽고서였다.

2008년 권위 있는 문학상인 나오키 상을 수상한 ‘리큐에게 물어라’는 일본 다도를 완성한 센노 리큐(千利休·1522∼1591)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센노 리큐는 일본 미의식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작가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는 소설에서 센노 리큐가 정립한 미(美)의 원점에 조선에서 납치된 여성과 그가 남긴 녹유(綠釉) 향합이 있다고 썼다. 물론 작가의 상상이다. 하지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일본의 다도와 미의식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2013년 작품이 영화화됐을 때 일본 우익은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다도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혐한(嫌韓) 풍조와 맞물려 인터넷에는 영화를 비판하는 글이 쏟아졌고, 작가를 향해 ‘반일(反日) 작가’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영화에는 작품의 모티브인 향합이 고려청자로 나온다. 다도를 권유한 일본인 지인은 “한국 박물관에서 본 청자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니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실제로 영화 소품을 만든 도예가는 한국을 여러 번 방문했고 고려자기를 깊이 공부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문화가 있을까. 차 문화는 중국에서 시작돼 한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갔다는 게 정설이다. 다도는 한중일에서 각각 발달했는데, 일본은 형식미를 극대화해 도(道)로 승화시킨 게 특징이다.

이웃인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로에게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한자와 불교는 한반도를 통해 전해졌으며, 조선 다완(찻잔)은 일본에서 ‘성 하나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근대 서양 문화는 일본을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의 만화, 대중가요, 소설 등에선 지금도 일본 문화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선 일본식 이자카야(선술집)가 호황이고, 일본에선 한국의 얼짱 메이크업이 유행이다.

한 나라의 문화가 다른 곳에서 전파됐다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이탈리아 피자가 미국식 피자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 카레가 인도 카레보다 열등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열고 상대의 문화를 받아들일 때 자신의 문화도 더 풍요로워진다.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한국 웹툰의 약진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교조적으로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고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쇠퇴의 지름길이다. 일본 다도를 공부하는 것이 한국 차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귀국하면 한국 다도도 배울 생각이다).

센노 리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황금다실을 경멸했고, 조선 다완으로 상징되는 소박하고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칭송했다고 한다. 꿈에서라도 만나면 리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미의식은 어디서 왔냐고, 혹시 다도가 한일 화해 협력의 단초가 될 수는 없겠냐고 말이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다도#나오키 상#리큐에게 물어라#야마모토 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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