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왜관 일본인 500명, 조선식 도자기도 썼지만 음식은 일본식으로 먹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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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 도쿄예술대 교수 논문
문헌 벗어나 고고학적 발굴 의미

일본 사가현 아리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조각.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은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부산박물관 제공
일본 사가현 아리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조각.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은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부산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일본인이 거주하던 마을인 왜관(倭館)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 및 무역의 중심지였다. 특히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양국 간 국교 재개를 위해 1678년 부산 용두산 자락에 설치한 초량왜관은 약 33만579m² 규모로, 대마도에서 온 500여 명이 살았다. 이들은 일본 조리도구로 일본 요리를 만들고, 조선 도기로 술이나 조미료 등을 보관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가타야마 마비 도쿄예술대 미술학부 교수는 9일 한일관계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초량왜관 선창지 유적 발굴 성과에 대하여’ 논문을 발표했다. 가타야마 교수는 2018년 8월 부산박물관과 함께 부산 중구 동광동 공사현장에서 수습한 도자기 조각들을 조사했다. 공사 현장은 왜관요(倭館窯) 자리로 알려진 옛 로얄관광호텔로부터 250m 떨어진 지점의 선창 부지다. 왜관요 수리 공사 과정에서 도자기 조각들이 선창 부지까지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에선 2.6m 깊이의 토층에서 기와 조각 57개, 도자기 조각 449개가 나왔다. 이 중 조선 옹기 조각이 191개로 가장 많았고, 이어 일본 도자기 조각 71개, 왜관요 도자기 조각 49개, 조선 백자 조각 48개, 일본 백자 조각 44개 순이었다.

출토품은 왜관 거주 대마도인들의 일상생활을 잘 보여준다. 유물 중에는 된장을 짓이기는 용도의 일본 도기 스리바치(擂鉢)와 흙으로 만들어진 일본 냄비의 일부가 포함됐다. 이들 대부분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옹기 조각도 191개로 많이 발견됐다. 가타야마 교수는 “일본인들이 왜관에서 주로 일본 요리를 해먹었지만 선물로 받거나 구입한 조선 옹기에 술이나 조미료 등을 보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견된 일본 백자의 생산지는 일본 사가현 아리타(有田)로 분석됐다. 정유재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기를 구운 조선 도공 이삼평(미상∼1656)이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추앙받는다. 임진왜란 때 납치된 사기장 이우경이 만든 나가사키현 하사미(波佐見) 가마에서 제작된 자기도 포함됐다.

그동안 초량왜관에 대한 학술 연구는 문헌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이 같은 고고학 연구는 드물었다. 2018년 가타야마 교수와 함께 유물을 수습한 나동욱 영남성곽연구소장(전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왜관은 한일 간 무역 교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라며 “앞으로도 중요 유물들이 발굴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초량왜관#왜관#가타야마 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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