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죽지마, 아들 말에 ‘그놈’ 잡을 결심”…‘시민 덕희’ 못다 한 이야기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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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년 2월 17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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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덕희’(라미란)의 실제 인물인 김성자 씨
2016년 보이스피싱에 넘어가 3200만원 잃어
범인들 잡았지만 여전히 피해액과 포상금 받지 못해

영화 ‘시민 덕희’의 모티브가 된 김성자 씨(왼쪽)와 이를 연기한 라미란 배우
영화 ‘시민 덕희’의 모티브가 된 김성자 씨(왼쪽)와 이를 연기한 라미란 배우

약 7년 전 언론에서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표현한 사건이 있었다. 보이스피싱에 당한 가정주부가 경찰의 미온적 대응에 실망한 후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힘으로 중국에 있던 총책을 잡아낸 사건이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 사건이 진짜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난달 24일 개봉한 ‘시민덕희’가 그 내용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개봉 첫 주 2024년 영화 흥행 순위 1에 올랐으며, 16일 기준 누적관객 154만 명을 돌파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덕희’(라미란)의 실제 인물인 김성자 씨(50)를 경기도 화성의 모처에서 만났다. 그에게 들은 실제 이야기는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김 씨가 보이스피싱을 당하게 된 이유까지 영화에 자세히 묘사되진 않았지만 들어보면 ‘누구라도 당할 수 있겠다’ 싶은 상황이다.

김 씨는 2012년 4살 된 아들과 함께 한 건물에서 추락사고를 당해 2015년까지 오랜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2016년 1월 “재판 과정에 건물 압류 비용이 필요하다”는 검찰 측의 전화를 받았다. 사법기관을 사칭한 사기 전화였다.

상대는 재판의 상세한 내용까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김 씨는 의심하지 못했다. 오랜 병원 생활로 돈도 없고 절박한 상황이었던 김 씨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야 했고, 대출을 유도하는 그들의 2차함정에 빠져버렸다. 범인은 OO은행 OO지점 박OO이라고 적힌 은행 신분증까지 보내주며 김 씨를 유인했다.

“바지에 실례할 정도로 큰 충격”
영화 ‘시민 덕희’에서 덕희가 보이스피싱에 당한 것을 알게 된 후 충격받아 쓰러지는 장면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 덕희’에서 덕희가 보이스피싱에 당한 것을 알게 된 후 충격받아 쓰러지는 장면 (쇼박스 제공)

결국 보이스피싱 일당은 김 씨에게 총 3200만 원을 뜯어갔다.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챈 김 씨가 해당 은행을 찾아가 신분증 사진을 보여줬더니 경비원이 “또 이 녀석이네”라며 혀를 찼다. 가짜 신분증 속 남성에게 속아 다녀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김 씨가 혼이 나간 상태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경찰차가 따라붙었다. 너무 큰 충격으로 자기도 모르게 비틀대 음주운전 신고가 들어간 것이다. 김 씨는 “술도 안 마셨는데 음주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차 세우라고 난리가 났다. 일단 내리라고 해서 내리면서 그만 바지에 실례를 해버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정신을 차린 김 씨는 자초지종을 경찰에 알렸지만, 며칠 후 돌아온 답변은 “그거 못 찾아요”라는 절망적 내용이었다.

극단적 생각까지…우는 아이 보고 ‘아차’정신 들어
김 씨는 “내가 바보라 당했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해서 술과 수면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들이 울면서 “엄마 미안해 나 때문에 죽지마”라고 말했다. 이 말에 정신을 차려보니 당시 김 씨가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차’ 싶었던 김 씨는 “경찰이 못 잡으면 나라도 해봐야지”하는 심정으로 이때부터 팔을 걷어붙였다. 보이스피싱과 주고받았던 연락처로 낮이고 밤이고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안 받으면 다른 전화로 번갈아 가며 걸었다. 보이스피싱에 속아주는 척 가상계좌에 100원~ 500원을 입금하는 방식으로 끈질기게 접근했다.
영화 ‘시민 덕희’에서 보이스 피싱 조직원이 덕희에게 제보하는 장면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 덕희’에서 보이스 피싱 조직원이 덕희에게 제보하는 장면 (쇼박스 제공)

그러던 어느날 밤, 익숙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의 남성은 자신이 보이스피싱 조직원(본부장)이라며 “김 씨를 돕고 싶다”고 했다. 김 씨는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그러냐. 이런 미친 XX들 너한테 줄 돈 없다”라고 육두문자를 날렸다.

그런데 남성이 놀라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남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직과 총책의 실체를 낱낱이 털어놨다. 자신도 감금 협박당하고 있으며 총책이 술 마시러 나간 사이에 몰래 전화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총책의 실명과 나이, 설을 앞두고 항공편으로 귀국할 예정이라는 구체적인 정보까지 알려줬다. 하나하나 정보를 받아 적은 김 씨는 곧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나 김 씨가 들은 첫마디는 “아줌마 또 사기당했어요? 에이 아줌마 그걸 믿어요?”였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김성자 씨에게 보내온 자필 진술서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김성자 씨에게 보내온 자필 진술서
“초등생도 범인 잡을 만큼 단서 수집해 제공”
이대로 허망하게 포기할 수 없었던 김 씨는 “나 혼자라도 잡는다”라는 심정으로 며칠 동안 잠도 안 자고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를 기다렸다. 발각을 우려해 김 씨가 먼저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그렇게 김 씨는 조직원을 통해 중국 근거지 사진과 주소, 총책 얼굴 사진, 인상착의, 돈을 뜯긴 800명의 명단, 고액 피해자 명단, 총책의 가족관계, 한국 은신처 주소까지 모두 수집했다. 조직원이 자필로 쓴 범행 진술서도 김 씨가 설득해서 받아냈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김성자 씨에게 보내온 중국 근거지와 총책 얼굴 사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김성자 씨에게 보내온 중국 근거지와 총책 얼굴 사진

김 씨는 “초등학교 1학년짜리도 범인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온갖 단서를 다 알아내서 경찰에 가져다줬다. 그런데도 경찰은 ‘사진이 흐릿하다. 이게 부족하다 저게 부족하다. 이거 물어봐라. 저거 물어봐라’라고 말했다”고 떠올렸다.

특히 김 씨는 중국에 사는 지인을 통해 총책이 몇날 몇시에 어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올 예정인지까지 알아냈다. 하지만 경찰은 “명절날 수천 명이 중국에서 넘어오는데 관광객도 많은 공항에서 어떻게 잡냐. 그 시간에 실제로 중국에서 뜰지 안 뜰지도 모르고, 좌석 번호를 알아야 잡는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소극적이었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김 씨는 “총책의 한국 거주지로 가서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냐”며 본인이 직접 총책의 집 앞으로 가 수일간 잠복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총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김성자 씨에게 보내온 패해자 명단과 전화번호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김성자 씨에게 보내온 패해자 명단과 전화번호
“내 노력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아”
영화 ‘시민 덕희’에서 덕희가 범인을 찾기 위해 잠복하는 모습 (쇼박스 제공)
영화 ‘시민 덕희’에서 덕희가 범인을 찾기 위해 잠복하는 모습 (쇼박스 제공)

며칠 뒤 지인으로부터 “언니 뉴스 봤어? 중국 보이스피싱 총책이 잡혔다는데 언니가 말한 그 사람 같아”라는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경찰이 총책 입국 당일 공항에 가서 검거했지만, 김 씨에게 연락은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아 외부에는 경찰의 공로만 대대적으로 알려진 상황이었다.

영화는 총책을 검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김 씨의 전쟁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김 씨는 총책만 잡으면 피해금액 3200만원도 돌려받고 경찰이 내건 신고 보상금 ‘최대 1억 원’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피해액을 돌려받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그사이 김 씨와 같은 피해를 입은 1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있었다.

김 씨는 돈을 돌려받기 위해 구치소에 수감된 총책을 7번이나 면회했다. 총책은 “범죄 수익금을 모두 압류당해 돌려줄 돈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당한 사람이 멍청한 거지 왜 나한테 와서 그러느냐”며 김 씨를 비웃었다. 나중에 가서 형량을 줄이기 위해 변호사를 통해 500만원이라는 합의금을 제시했지만 김 씨는 “차라리 벌이나 세게 받으라”며 합의해 주지 않았다.

김 씨는 경찰에게 압류된 돈에 대해 물었지만 “범죄 수익금은 건드릴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신고 포상금이라도 받아 만회해 보려 했지만 수개월 째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경찰서에 먼저 전화를 거니 “깜빡했다”며 선심 쓰듯 100만원을 주려 했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화가 난 김 씨는 “내 공로를 인정하는 대한민국경찰청장 명의 표창장을 함께 주지 않으면 안 받겠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김 씨는 자신의 제보로 경찰이 총 6명을 일망타진했지만, 지금까지도 어떤 피해 금액이나 포상금 1원 한푼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 경찰의 수장이나 조직도 바뀌며 영화가 나오기까지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김 씨는 “주변에서 보이스피싱 당하면 바보다 멍청하다 소리를 듣는데,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줬으면 좋겠다”며 “저 또한 죽음에 문턱에서 눈을 떴는데 이렇게 살아있으니 지금은 아이들이 다 잘 컸다”고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줬다.

경찰을 향해서는 “모든 경찰이 다 그런 건 아니고 하도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많으니 한편으로 이해는 간다”면서도 “반성하길 바란다. 저 같은 피해자가 또 안 나타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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