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전쟁의 기억은 불신과 증오의 망령이 되어 떠돌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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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국 작가 12년 만의 새 소설집
산 자의 세계 맴도는 전쟁의 기억
치유되지 않은 고통은 현재진행중
◇굿/전상국 지음/360쪽·1만6000원·문학과지성사

그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함께 있던 친구들의 기억마저 서로 엇갈린다. 인민군들이 대한민국 국군 일등병 정대수의 손을 뒤로 묶고 고개 너머로 끌고 간 일, 이후 마을 사람들이 산속에 숨어 있던 어린 인민군을 잡아 산 채로 땅속에 묻었던 일,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용호가 마을 사람들의 쇠스랑에 찔려 죽은 일…. 마을 사람들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었던 수십 년 전 그날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내가 바로 최용호”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표제작은 6·25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 자신이 최용호라고 주장하는 남자는 온 동네를 뒤지며 그가 묻힌 자리를 파헤치고, 그와 연을 맺었던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옛일을 캐묻는다. 마치 무당이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듯 옛 기억을 불러낸 그로 인해 오래전 망각했던 기억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가 진정 최용호인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자신들의 손에 죽었던 ‘빨갱이’ 최용호가 여전히 그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올해로 등단 60년이 되는 소설가 전상국(83)이 2011년 ‘남이섬’(민음사) 이후 12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책에 담긴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 중 표제작을 포함한 4편의 이야기에 전쟁의 상처를 오늘날까지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단편 ‘저녁노을’은 6·25전쟁 때 팔 하나를 잃은 신재호란 남자가 노인이 돼 동창들 앞에 나타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의 명함을 받아 든 ‘나’는 어린 시절 팔 하나가 없단 이유로 그를 괴롭혔던 기억을 떠올린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현재진행형인 한국전쟁의 악령, 오늘날까지도 불신과 증오의 천형을 사는 사람들의 절규, 그 울분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어 “모두를 내려놓아야 할 나이에 잔불 살리듯 공을 들인 아홉 편의 중·단편소설을 모아 생애 마지막 소설집을 묶는다”고 썼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전쟁의 기억#불신과 증오#전상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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