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범죄영화 방불케하는 국제 원자재 시장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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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중개자들/하비에르 블라스, 잭 파시 지음·김정혜 옮김/604쪽·2만5000원·알키

자원은 풍부하지만 내전이 벌어지는 나라가 있다. 반군이 자원을 팔아 전비를 충당하려 한다. 자원이 채굴되기는 할까, 운송은 할 수 있을까, 얽히고설킨 국제 역학관계 속에서 팔 수나 있을까. 웬만한 기업이라면 엄두가 안 날 것이다. 그러나 극도의 고위험에도 주판을 두드린 뒤 이익이 날 것 같으면 계약을 맺고 고수익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 글로벌 원자재 중개업체들이다.

석유, 금속, 곡식, 면화, 원두…. 당연한 얘기지만 원자재가 없으면 경제는 굴러가지 않는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출신의 베테랑 저널리스트들이 오랜 취재를 바탕으로 국제 원자재 시장을 주무르는 중개업체들의 내막을 다뤘다.

오직 이익만 좇는 이들 업체에는 선악이 중요하지 않다. 아프리카 내륙국 차드의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 장군은 2013년 중앙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키운 이슬람 민병대와 맞설 자금이 부족했다. 돈을 융통할 곳이 막힌 데비의 손을 잡아준 곳이 세계 3대 원자재 중개업체 가운데 하나인 글렌코어였다. 글렌코어는 차드의 원유 수출 권리를 담보로 그해에만 6억 달러를 지원했다. 데비 정부는 잔인한 학살과 고문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복잡한 정치 갈등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는 2014년 이라크 정부와 이슬람국가(IS)가 싸우는 틈을 타 키르쿠크의 유전을 장악했다. 이라크 정부는 해당 석유의 수출 권리가 중앙정부에 있다며 법적 대응을 거론했지만 원자재 중개업체들은 쿠르드 정부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이라크 북부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뻗은 송유관으로 석유를 운송하며 석유 수출을 숨겼다. 2017년 한 유조선에 실린 석유가 쿠르드족의 ‘장물’이라며 이라크 정부가 소송을 냈지만 유조선은 무선 표지를 꺼버리고 아예 사라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의 투자은행들이 몸을 사리면서 원자재 중개업체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규제를 우습게 알고, 부정한 거래를 서슴지 않으며, 막대한 이익을 올려도 세금을 피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화를 돋우는 한편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제 원자재 시장#얼굴 없는 중개자들#중개업체들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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