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결과 마술하던 청년, 유튜브 인기 ‘과학 전도사’ 되다[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22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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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튜브채널 ‘안될과학’의 과학 커뮤니케이터 강성주 박사 (상)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국립과천과학관의 천문대에 있는 1m 반사망원경 앞에 선 강성주 박사.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약 중인 강 박사는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처럼 대중을 과학의 세계로 초대해 알기 쉽게 안내하는 역할을 꿈꾼다. 과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은 인간을 놀라게 하는데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해왔다. 지금보다 더 먼 곳을 관측하고 더 작은 영역을 들여다봤을 때 무엇이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한다면, 우주의 조리법을 발견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해리 클리프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책 ‘다정한 물리학’에서)

흐드러지게 피고 지기론 벚꽃 못지않다. 요즘 유튜브 채널들 얘기다. 알고리즘과 자극이란 밀물 썰물에 휩쓸리다 보면, 뭘 따라가는지 정신 차리기도 버겁다. 그 와중에도 힐끗 보기엔, 다소 민숭민숭한 채널이 하나 있다. 과학 전문 채널 ‘안될과학.’ 간판에 달린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박사급 아재들이 만든, 될 과학 안 될 과학 다 만드는 본격 과학 채널”이란 설명에도 왠지 문턱 넘기 망설여진다.

하지만 2018년 시작한 안될과학은 현재 구독자 수가 77만 명(19일 기준)에 이르는 탄탄한 인기를 구축했다. 천문학 물리학 생명과학 등 정통 과학정보에 열광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채널 주인장들인 궤도와 항성, 약, 공진(모두 예명) 등도 이제 온라인 안팎에서 상당한 대중적 인지도를 자랑한다.

특히 ‘항성’으로 활동 중인 강성주 박사(42)는 현재 국립과천과학관에 소속된 연구사. 학자이자 공무원으로 공사다망한데도, “잠 잘 시간 쪼개가며” 안될과학에 매진해왔다. 평탄하게 실적 쌓으면 그만인 그가 왜 굳이 ‘돈 안 되는’ 가욋일에 이리도 진심인걸까.(※강 박사는 안될과학에서 단 한 푼도 출연료를 받지 않는다) “여러분의 시간을 낭비해드릴”(안될과학 시그니처 인사법) 과학자 항성을 만나봤다.

인기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 출연진들. 왼쪽부터 과학자 궤도와 랩장 유니, 항성(강성주 박사), NASA 앰배서더 폴 윤 교수. 사진제공 강성주 박사


-유튜브 스타를 만나 영광입니다.
“에구, 무슨 말씀을요. 국립과천과학관 천문우주팀에서 일하는 공무원 신분의 연구사(硏究士)일 뿐입니다. 물리 천문 기상 등을 담당하고 있고요, 교육이나 전시 등을 기획 운영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안될과학은 ‘과학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공부할 때부터 꿈꿨던 일이라 즐겁게 하는 거예요.”

-과학 커뮤니케이터란 게 뭔가요.
“말 그대로 과학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보시면 될 거 같아요. 우리말로는 적당한 대체어가 없긴 한데…, 흔히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거 아니냐고 오해하는데, 그건 좀 달라요. 전문성을 갖고 있되 일반인 눈높이에서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삼키기 편하게 만들려 노력하지만, 어떻게 소화하는가는 각자 받아들이는 이가 편하게 선택하는 거죠.”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되고 싶으셨나요.
“네, 신기하게도 한 번도 장래 희망이 바뀐 적이 없어요. 일곱 살 때쯤 과학만화를 좋아했는데, 거기서 마주한 보이저 2호가 우주에서 찍은 사진에 반해버린 뒤 언제나 천문학자를 꿈꿨어요. 무작정 졸라서 아버지가 천체망원경을 사주셨는데, 처음엔 어떻게 보는지 방법도 몰랐죠. 며칠을 만지작거려서 드디어 목성을 처음 봤을 때의 그 희열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근데 저뿐만 아니라, 천문학자들은 어릴 때 우주나 별에 빠져서 그대로 이어진 경우가 많아요.”

-첫사랑과 그대로 결혼한 셈이네요.
“다 부모님 덕분입니다. 언제나 제 꿈을 지지해주시고, 얘기를 경청해주셨어요. 어릴 때 제가 정말 말이 많았거든요. 어른들이 보기엔 쓸데없는 얘기인데도 절대 막지 않고 귀 기울여 주셨어요. 한번은 어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셨는데, 수다 떠느라 하나도 못 먹고 국물이 없어질 정도로 탱탱 불어터졌어요. 근데 제 앞에 앉아 조용히 다 들어주신 뒤 ‘걱정 마. 다시 끓여줄게’ 하셨을 정도예요. 아이 입장에선 너무 고마운 대화 상대가 되어주신 거죠. 전 지금도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려면 그 아이의 얘기를 들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2003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강성주 박사(왼쪽)와 이은결 마술사. 19살 때 마술로 의기투합했던 둘은 당시 이곳에서 열린 마술올림픽에 한국인 최초로 참여했다고 한다. 당시 강 박사는 마술 보조와 현지 통역, 매니저 등의 역할로 친구 이은결 씨와 동행했다. 사진제공 강성주 박사
-부모님 속 썩인 일은 없으셨나 봐요.
“아, 웬걸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진 괜찮은 아들이었을 수도 있는데, 대학 가면서 큰 사고를 쳤죠. 실은 연세대를 수시로 붙어놓고, 시간이 남아서 취미를 찾다가 마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한국에서 마술이 그리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시절은 아닌데, 우연히 마술 동호회 모임에 갔다가 은결이를 만났는데….”

-세계적인 마술사 이은결 씨 말인가요.
“흐흐. 네, 저랑 동갑이에요. 그 친구 만나서 완전히 빠져서는, 대학이고 뭐고 필요 없고 무조건 마술사 되겠단 생각밖에 없었어요. 은결이가 마술 쇼하면 보조 역할도 하고. 용품 비용 대느라 대학 등록금으로 받은 돈도 다 갖다 썼어요, 부모님 몰래. 입학금만 내고 등록은 안 했으니, 결국 1학기 끝나고 집에 통보가 온 거죠. 매일 신촌에 간다기에 학교 가는 줄 아셨던 부모님이 정말 충격이 크셨어요. 실은 마술 아지트가 신촌에 있었거든요.”

-놀라시는 게 당연하죠.
“그죠. 뭣보다 자식이 그간 당신들을 속인 셈이잖아요. 은결이까지 덩달아 불려 가서 엄청 혼났어요. 아버지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셨을 정도니까요. 은결이도 억울했죠. 제가 등록금까지 갖다 쓴 줄 몰랐거든요. 근데 혼나고 나와서 은결이가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말할게. 너 마술에 진짜 소질 없어. 머리는 똑똑하니 공부 다시 해라.’ 그때 뭔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친구를 위해 쓴소리한 게 아닐까요.
“맞아요. 덕분에 정신 차렸죠. 지금도 제일 소중한 친구 중의 하나예요. 근데 그대로 한국에 있으면 도저히 마술의 유혹을 떨칠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결심하고 이리저리 알아보니 천문학과로 유명한 미국 텍사스대학이 딱 저한테 맞을 거 같았어요. 다행히 토플이나 SAT 점수도 나쁘지 않아서 입학도 받아들여졌고요. 운 좋게 2001년 9·11테러 직전에 입학해서 학비도 미국학생과 동일했어요. 그 이후론 텍사스대도 국제학생은 미국 학생보다 서너 배는 학비가 비싸진 걸로 알고 있어요. 여러모로 운이 따랐죠.”

지난해 4월 12일 대전에서 열린 ‘유리스 나이트( Yuri‘s Night)’에서 만난 한국의 첫 우주인 이소연 박사(왼쪽)와 강성주 박사. 유리스 나이트는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이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한 것을 기념해 전 세계에서 열리는 글로벌 과학이벤트다. 사진제공 강성주 박사


-유학 가선 사고 치진 않으셨나요.
“하하, 아버지랑 똑같은 반응이네요. 눈앞에서도 그러는 놈을 뭘 믿고 보내주느냐고 하셨거든요. 다행히 마음 잡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원래 꿈이 천문학자이기도 했으니까요. 학부 때는 천문학 물리학 등을 전공했고요. 석박사 학위는,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요. 간단하게 말해서 별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유형으로 탄생하는가를 연구했어요. 그리고 뭣보다 미국 유학은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되겠다는 진로를 결정하는 소중한 시간이 됐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봐요.
“원래도 조경철 박사님(1929~2010)을 선망하기도 했지만, 학부 때 지역주민 행사에 참여한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한 아버지가 설명을 정말 집중해서 들으시는 거예요. 사실 한국 부모님들은 그런 곳에 오시면 아이들은 참여시키고 뒤로 살짝 빠져서 좀 쉬시는 경향이 있거든요. 괜한 궁금증이 생겨서 물어봤더니, ‘우리 애 하나가 자폐스펙트럼인데, 내가 알아들어야 우리 가족의 언어로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가족의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거네요.
“네, 맞아요. 그게 바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 사실 과학 용어나 개념이 대중에겐 낯설고 어려울 수 있잖아요. 근데 쉽게 설명하면, 관심 있는 분들은 대부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 다리를 놓는 일이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운 좋게 세계적인 천문학자 닐 타이슨(65)을 사석에서 뵌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위대한’ 칼 세이건(1934~1996)의 제자답게 제 꿈을 적극 응원해주셨어요. 너무 멋진 일이라며 그럴수록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셨죠.”

지난해 8월 다누리호 발사 뒤 아리랑TV에 출연한 강성주 박사. 사진제공 강성주 박사


-한국행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인가요.
“네, 실은 박사를 딴 뒤에 진로 고민을 좀 했어요. 아직 한국에선 과학 커뮤니케이터란 게 생소하기도 하고,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에서 그런 업무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한국천문연구원에 지원했다가 합격해서 갈지 말지 결정을 내려야 했죠. 나사에 대한 열망이 커서 망설였는데, 그때 지도교수님이 ‘조국에서 네 꿈을 펼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조언하셔서 귀국하기로 맘먹었습니다.”

-천문연구원에 5년 정도 계셨더군요.
“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연구직 인턴을 거쳐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었습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한데…. 좋은 연구와 프로젝트도 많이 했지만, 저랑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어요. 연구원은 아무래도 연구 중심이거든요. 국책기관이니 실적이 우선시되고, 외부 활동을 장려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건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 보급이나 대중화 쪽 일인데, 그럴 기회나 여지가 거의 없었어요. 안정된 직장이지만 꿈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국립과천과학관으로 옮긴 게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여길 오겠다고 확정하고 이직한 건 아니고요. 일단 연구원을 관두고 나와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다행히 와이프도 ‘꿈을 포기하지 마라’고 응원해줬고요. 국립과천과학관은 그 이후에 저랑 잘 맞겠단 생각에 들어온 거죠. 그리고 엇비슷한 시기에 ‘안될과학’에도 참여하게 된 거고요. 드디어 꿈에 다가가는 ‘성덕(성공한 덕후)’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하편에서 계속)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강성주 박사가 보내준 첫 번째 사진은 2004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대학 캠퍼스에서 찍은 학부 시절 사진입니다. 강 박사는 이곳에서 천문학 등을 공부하며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사진제공 강성주 박사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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