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고의-중과실 없음’ 입증 책임 지워… 비판 기능 위축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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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위의 언론중재법 〈2〉 ‘고의-중과실 추정’ 요건의 함정

국민의힘 김기현 원내대표(오른쪽)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여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폭주에 대해 “피땀 흘려 쌓아온 국가 이미지, 자유 언론 환경을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왼쪽부터 국민의힘 전주혜 원내대변인, 추경호 원내수석부대표. 사진공동취재단
국민의힘 김기현 원내대표(오른쪽)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여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폭주에 대해 “피땀 흘려 쌓아온 국가 이미지, 자유 언론 환경을 국제적인 조롱거리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왼쪽부터 국민의힘 전주혜 원내대변인, 추경호 원내수석부대표. 사진공동취재단
더불어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언론 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하면서 일정 요건에 해당할 경우 언론사에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다고 추정까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이 추정 요건을 들여다보면 개념과 기준이 모호해 헌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언론중재법 개정안 30조의 2에서 1항은 허위·조작 보도에 피해액의 최대 5배 손해배상이 가능하도록 했고 2항은 이 같은 징벌적 손해배상에서 언론사의 고의·중과실을 추정하는 요건 4개를 규정하고 있다. 해당 요건은 △‘보복적이거나 반복적인 허위·조작 보도로 피해를 가중시키는 경우’ △‘허위·조작 보도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은 경우’ △‘정정보도·추후보도가 있었음에도 정정보도·추후보도에 해당하는 기사를 별도의 충분한 검증 절차 없이 복제·인용 보도한 경우’ △‘기사의 본질적인 내용과 다르게 제목·시각자료(사진 삽화 영상 등)를 조합하여 새로운 사실을 구성하는 등 기사 내용을 왜곡하는 경우’다.




○ ‘보복’ ‘충분’ 등 모호한 규정
여기에는 ‘보복적’ ‘회복하기 어려운’ ‘충분한 검증’처럼 모호한 표현들이 많아 어떤 보도가 보복적인 것인지, 얼마나 검증을 해야 충분하다는 것인지 등을 규정할 수 없다.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이승선 한국언론법학회장(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은 “헌법상 명확성의 원칙은 기본권 중에서도 핵심 기본권인 언론·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때는 더욱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헌법재판소는 판단하고 있다”면서 “특히 기사 제목의 경우 본문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 역할을 하는데 얼마나 다르면 고의·중과실을 추정할 수 있는지 다툼의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언론중재법 처리 과정에서 초반에는 고의·중과실 추정 요건을 6개 만들었다가 비판이 일자 4개로 줄였다. 삭제된 요건은 △‘취재 과정에서 법률을 악의적으로 위반해 보도한 경우’ △‘정정보도 청구 또는 정정보도가 있음을 표시하지 않은 경우’다. 현재 법원은 언론의 보도 과정에서 법률을 어겼더라도 그 보도가 국민의 알권리와 직결되고 공익 실현의 목적 등을 갖고 있으면 위법성을 판단하지 않고 있다.

○ 비판 기능 가로막는 입증 책임
우리나라 법체계상 피해 구제를 결정할 때는 피해자가 입증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이 네 가지 요건에 해당하면 사실상 언론사가 고의·중과실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입증 책임을 지는 주체가 뒤바뀐 것이다.

법안 강행 과정에서 이에 대한 위법성 논란이 일자 민주당은 당초 조문에 빠져 있던 주어 ‘법원은’을 추가하고 ‘언론사의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이라는 문구에서 ‘언론사의’만 뺐다. 민주당은 이를 두고 원고(언론 보도 피해자)에게 입증 책임이 있음을 규정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언론학자들은 본질을 흐리는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는 “판결의 주체인 법원이 이같이 고의·중과실을 추정할 수 있게 한 것은 여전히 언론사에 입증 책임을 둔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사가 보도를 하면서 고의·중과실이 없다는 점까지 입증해야 한다면 언론의 비판 기능이 위축돼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정은령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SNU팩트체크센터장은 “권력형 비리 의혹이 있을 때 보도 대상이 된 당사자가 추가 보도를 막기 위해 일단 정정보도 청구를 한 경우 앞선 보도를 인용했다는 이유로 징벌적 손해배상의 고의·중과실을 인정하게 되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같은 보도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언론중재법#징벌적 손해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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