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예던길 따라 한 폭의 그림 속으로[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4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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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은 평생 ‘물러남’의 미학을 추구했다. 대과 급제 후 평생 140차례 벼슬이 주어졌지만 사직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은 것이 79차례다. 나아간 61차례마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의 호인 ‘퇴계(退溪)’는 ‘시내로 물러난다’는 뜻이다. 그는 고향인 안동의 낙동강변에 도산서당을 짓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내 ‘착한사람이 많아지는(善人多)’ 세상을 만드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삼았다. 이러한 퇴계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고 있는 도산서원선비수련원에서 2박3일간 숙박하며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과 함께 따뜻한 사람 향기로 가득찬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걸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예던길
퇴계는 도산서원에서 15km 가량 떨어진 청량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했다.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칭할 정도였다. 15세 때 숙부와 함께 오른 것을 시작으로 평생 6차례 청량산에 오른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청량산에서 책을 읽고, 가는 길에 수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가 마지막으로 청량산에 오른 것은 63세 되던 1564년 4월 14일. 퇴계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벽오 이문량(1498~1581)과 손자 안도를 비롯해 10여 명의 지인들이 함께 하는 산행이었다. 새벽부터 밥을 먹고 출발한 퇴계는 현재의 안동 도산면 원천리 내살미마을인 천사(川沙)에 도착했다. 안개 낀 산 봉우리에 물결은 출렁이고, 새벽 하늘은 곧 동이 트려 붉게 물들고 있다. 그런데 친구인 벽오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퇴계는 친구가 기다려도 오지 않자, 나귀의 고삐를 잡고 먼저 출발하면서 유명한 시를 남긴다. ‘나 먼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先入畵圖中)!’


‘예던길’은 퇴계가 청량산에 가던 낙동강변 4~5km 구간의 길이다. 숲 속 오솔길과 은빛 물결 주변에 펼쳐지는 학소대, 농암종택, 고산정의 수려한 풍경은 퇴계가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한 폭의 동양화를 방불케한다. ‘산(山)태극, 수(水)태극’이란 말처럼 산이 굽이치는 형세에 따라 물도 S자로 굽이친다. 퇴계는 나귀를 타고 미천을 건너면서 읊은 시에서 ‘맑고 맑은 여울(淸淸灘)과 높고 높은 산(高高山)’이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보이네(隱復見)’라며 지형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풍경을 표현했다.


예던길의 단천교 앞에는 ‘녀던길’이라고 새겨진 돌이 있다. 퇴계가 지은 유일한 한글 시조인 ‘도산십이곡’ 중 아홉 번째 곡에 “고인을 못 뵈어도 녀뎐길 앞에 있네/녀던길 앞에 있으니 아니가고 어쩔고”에서 따온 말이다. ‘녀던길’은 옛 성현이 가던 길이라는 뜻이다. 독일 하이델베르그에는 칸트, 괴테, 헤겔이 걸으며 사색하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사색하던 ‘예던길’도 그에 못지 않은 인문학 여행지인 셈이다.

예던길을 걷다보면 강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네모난 바위를 만난다. 퇴계가 ‘경암(景巖)’이란 시에서 읊은 바위다. 그는 거센 물결 속에서도 천년동안 변함없이 가운데 서 있는 바위를 보며 시류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의 ‘부평초’ 같은 삶을 되돌아본다.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에 벼슬을 지키려 하고, 권력을 좇는 먼지 속 세상에서도 한 가운데 중심을 잡는 바위같은 존재를 묵상하는 시다.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 청량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시비에서 퇴계는 자연 속을 거니는 ‘유산(遊山)’이 독서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산을 거닐며 얕고 깊음, 근원을 배우고,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며 묘함을 깨닫고, 오르고 내려옴을 성찰한다. 그에게 산과 자연은 그에게 바로 학교이고 도서관이며, 학문의 전당이었던 것이다.



●새벽에 걷는 퇴계 명상길

도산서원선비수련원의 아침은 5시반에 ‘퇴계명상길’ 산책으로 시작된다. 새벽 산책 코스는 퇴계가 머물렀던 한서암에서부터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도산서원까지 가는 왕복 1.5km 남짓한 산길이다. 이슬을 머금은 새벽공기가 감도는 초록빛 세상에는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퇴계 선생이 지은 시조 ‘도산십이곡’을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걷다보니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도산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서원은 조선시대 존경스러운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설립한 사학 교육기관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서원이 사후에 지어지는 것과 달리,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생전에 직접 설계하고, 머무르며, 제자들을 10년 동안 가르쳤던 도산서당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도산서당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 마루 한 칸의 소박한 건물이다. 담장은 곳곳이 뚫려 있고, 나무를 엉성하게 얽은 사립문이 손님을 맞는다. 도산서당의 현판은 퇴계 선생이 직접 썼다. 세로로 기둥에 달린 현판 글씨가 무척 작고, 유머러스하다. ‘산(山)’자는 그림으로 표현됐고, ‘서(書)’ 자에는 새가 그려져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이를 찾는 새처럼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그려넣었을까. 이 곳에서 60대의 대유학자였던 퇴계 선생은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사립문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의 사후에 세워진 전교당에 있는 현판 ‘도산서원’은 당대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 전교당 뒤편에는 퇴계와 제자 월천 조목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기자도 유건과 제복을 입고 사당 안에 들어가서 ‘퇴도 이선생(退陶 李先生)’이라고 씌여져 있는 퇴계 선생의 위패에 향을 올리고 인사를 드리는 알묘(謁廟)를 했다.

퇴계 선생 위패에 알묘하는 본보 전승훈 기자(왼쪽)와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퇴계 선생 위패에 알묘하는 본보 전승훈 기자(왼쪽)와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도산서원을 천천히 걷다보면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선비가 은둔하며 수양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군자는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처럼 앞에는 낙동강 물과 수려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천원권 지폐 뒤쪽에 새겨진 겸재 정선의 그림에 나오는 선경이다.


이 곳에는 퇴계 선생이 잠시 쉬며 사색하던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가 있다. 날씨가 좋을 때면 ‘하늘, 빛, 구름’의 ‘그림자’가 강물에 비쳐 함께 배회하는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는 곳이다. 김병일 원장은 “물이 맑고 깨끗할 때는 천, 광, 운이 물속에 잘 비치지만, 바람이 불거나 먹구름이 가리면 잘 드러나지 않는다”며 “사람도 나쁜 마음, 사악한 생각을 하면 착한 본성은 가려지기 때문에, 선한 생각으로 마음을 닦아 착한 본성이 드러나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선비의 마음수양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후손에게 전해진 퇴계의 정신과 인간미

퇴계가 대학자를 넘어 성현(聖賢)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남녀, 신분 차이를 넘어 모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실천한 삶 때문이다. 퇴계 종택과 퇴계가 태어난 태실, 묘소 등 도산서원 주변을 걷다보면 꼿꼿한 선비로만 알았던 퇴계가 사실은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어른이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퇴계의 묘소 밑에는 맏며느리(봉화 금씨)의 무덤이 있어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퇴계는 요즘말로 하면 ‘츤데레(겉으로는 무뚝뚝해보이지만 사실은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시아버지였다. 퇴계는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남겼다. 그 중에서 며느리가 생일에 버선이나 옷을 선물해서 보내면, 한양에서 조정에서 일하던 퇴계가 고마움을 표하는 편지와 함께 참비, 바늘 등을 사서 답례품으로 보낸다는 내용이 많다. 또한 퇴계는 평소 병약했던 맏며느리를 위해 전국의 유명한 약수터에 보내거나 사물탕, 반총산 등 약재를 손수 지어 보내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퇴계의 장례기간 중에 세상을 떠난 맏며느리는 이렇게 마음을 써주었던 시아버지 밑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는 퇴계의 증손자의 비극에 관한 사연이다. 퇴계의 맏손자(이안도)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맏손부 권씨 부인이 아들과 딸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그런데 불행하게 산모인 맏손부가 젖이 부족했고, 갓 낳은 딸에게 우선 젖을 줄 수 밖에 없다보니 아들에게 젖을 주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도산에 있는 할아버지 퇴계 선생께 유모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딸을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학덕이라는 여종이 젖이 풍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덕이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편지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여종을 보내면 그녀가 낳은 아이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남의 아이를 죽여 내 자식을 살리겠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이는 네가 배운 성인의 가르침에도 어긋나지 않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몇 달 후 집안의 대를 이어야할 맏증손자는 죽고 말았다. 결국 양자를 들이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지만, 퇴계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분고하와 상관없이 모든 생명은 한결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이다.


퇴계 종택에 들어섰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김병일 원장과 함께 종택의 대문에 들어서자 퇴계 16대 종손인 이근필(90) 옹이 서둘러 두루마기를 입고 마중을 나왔다. 방 안에서 서로 큰절로 인사를 한 종손은 매실차를 놓고 30여 분 동안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이야기를 나눴다. 도산서원선비수련원에서 체험하는 어린 학생들이 찾아와도 종손 어르신의 ‘공경의 무릎꿇기’ 자세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늘 손님을 맞으실 때의 자세를 보고 몸에 자연스럽게 배인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아흔살의 나이인 그는 요즘도 신문의 서평을 꼼꼼히 읽으며, 최신 경제경영서까지 주문해 읽고 있었다. 그에게 집 안에서 내려오는 퇴계 선생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이냐고 묻자 “남과 다툴 때 절대 이기려 하지 마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식들에게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에겐 꼭 이길 것을 요구하는 요즘의 세태와는 사뭇 다른 말이이었다. 도산서원선비수련원을 설립한 그는 ‘남의 허물은 덮어주고 착한 것은 드러내자’는 ‘은악양선(隱惡揚善)’ 운동을 제창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종손은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준 뒤 대문 앞까지 배웅하며 깊게 허리숙여 인사했다. 그는 떠나는 기자에게 자신이 직접 붓글씨로 ‘조복(造福)’이라고 쓴 글귀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구복(求福)이나 기복(祈福)은 미신의 영역이지만, ‘조복’은 스스로의 힘으로 복을 만들어낸다는 진취적인 생각”이라며 ‘조복’이란 단어를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려달라고 했다.

● ‘광야’의 저항시인 이육사의 고향
퇴계는 제자들에게 늘 배움과 실천을 함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쳤다. 나라가 어려울 때 분연히 일어나 싸우는 견위수명(見危授命)이 바로 선비정신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퇴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하계마을에는 구한말 의병활동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한 독립유공자 25명이나 나왔다. 마을 입구에는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독립운동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고개너머 원촌마을은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의 고향이다. 이육사문학관에서는 퇴계의 14대 후손인 이육사 시인의 친필원고와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독립운동가로서 치열했던 삶을 볼 수 있다.


원촌마을에서 만난 이육사 시인의 외동딸 이옥비(81) 여사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 여사는 “1943년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이육사 시인이 베이징 감옥으로 이송될 때 청량리역에서 아버지를 뵀다”며 “당시 나는 네 살이었는데 얼굴에 짚으로 만든 용수를 쓰고, 포승줄에 묶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무서웠고 놀라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원촌마을 뒷산인 윷판대에 오르면 이육사 시인이 대표작인 ‘광야’의 시상을 떠올렸다는 전망대가 있다.



●퇴계선생 마지막 귀향길=선조의 만류에도 말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퇴계는 69세에 임금에게 일시적인 귀향을 허락받는다. 노구를 이끌고 서울 경복궁에서 경북 안동까지 총 700리에 이르는 귀향길을 거쳐 14일 만에 안동에 도착한다. 귀향 후 1년9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마지막 귀향길이었던 셈이다. 퇴계의 귀향길은 지난 2019년 도산서원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제1회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 걷기 행사’를 개최한 후로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불리며 인문학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서울 경복궁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총 5개 광역 지자체를 거쳐가는 총 270여㎞의 대장정은 하루 평균 20㎞씩 꼬박 13박 14일간 걸어야 완주할 수 있다. 올해 두 번째로 실시된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 걷기’는 지난 15일 경복궁에서 출발했으며, 강남 봉은사, 양평, 여주, 충주, 단양, 죽령을 거쳐 28일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할 예정이다.



●맛집=안동에서는 제사 음식을 고추장 대신 간장에 비벼먹는 풍습이 있다. 안동 월영교 앞에 있는 ‘헛제사밥 까치구멍집’에서는 놋그릇에 6가지 나물, 탕국, 전, 김치, 안동식혜가 어우러진 헛제사밥 한상차림을 맛볼 수 있다.



‘청포도’ 시인 이육사의 고향인 안동 도산면에는 ‘264 청포도 와인’을 만드는 와이너리가 있다. ‘264’는 이육사 시인의 수인번호.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국산 청포도 품종 ‘청수’를 이용해 만드는 화이트 와인은 ‘광야’ ‘절정’ ‘꽃’ 3종류가 있으며, 상큼한 과일향과 산미가 조화를 이룬다.



글·사진 안동=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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