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정민 윤 “日 위안부 폭력뿐 아니라 인간의 잔인함 담아”

  • 뉴시스
  • 입력 2020년 8월 13일 15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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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단서 데뷔, 한국 이민자 시인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시집 출간
소설가 한유주 번역…여성 작가들 협업 주목

‘미군들이 내게 DDT(살충제)를 너무 많이 뿌렸고 / 이가 전부 떨어져 나갔지 / 12월2일이었다 / 나는 자궁을 잃었고 / 이제 일흔이었다’ (-에밀리 정민 윤, ‘증언들’ 중에서)

한국인 이민자 여성 시인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폭력’에 파고들었다. 미국 문단에서 주목받으며 데뷔한 에밀리 정민 윤 작가의 이야기다.

1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는 작가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출간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을 유린당한 여성의 몸에 투영하면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과거 피해와 아픔들을 고발하고 기록한다.

피해자들에게 남은 정신적 외상과 그들을 온전하게 위로하지는 못하는 타인들의 모습을 담으면서 우리가 왜 위안부 피해와 같은 폭력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고민의 방향까지 제시한다.

나아가 자신이 경험한 숱한 차별과 배제를 털어놓으며 이민자, 동양인, 여성 등 유전적 트라우마를 다루면서 전쟁 폭력을 넘어 현대 여성들이 겪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폭력까지 다룬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책을 쓰고 싶었어요. 이 책이 반일민족주의적으로 읽히는 건 원치 않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폭력 뿐 아니라 전쟁 폭력, 여성 폭력까지 다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배열을 통해 균형을 맞추고 싶었어요. 제 경험과 아시아계 등이 겪는 폭력을 담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작가가 선보이고자 한 폭력들의 고발은 ‘일상의 불운’이란 작품들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산문시 형태인 작품은 같은 제목으로 여러개 작품이 들어있다. 위안부 관련 부분부터 이 시대의 그것까지, 일인칭 시점으로 각기 다른 폭력들을 다룬다.

작가는 “박스 형태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잔인함, 끔찍한 내용들을 산문을 읽거나 전문을 읽을 때의 호흡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챕터 ‘고발’에 담긴 ‘일상의 불운’ 중 한 작품엔 전쟁 속 십대 여성의 일상이 그려졌다. ‘빼앗긴 나라에서 몸이란 무엇일까’ 혹은 누구의 것일까‘, ’나를 포기해‘, ’전쟁이 두려웠겠나. 동맹군이 무서웠지‘ 등 여성으로서 느낀 시대의 폭력, 전쟁의 폭력, 일본군의 폭력, 미군의 폭력 등이 고루 배치돼있다.

현장에서는 ’과거 피해 역사를 담는데 있어서, 시의 간결성이란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았냐‘는 질문과 ’전달력이 부족하지 않겠냐‘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자 작가는 “그건 지금도 고민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현재 디지털 스피드 시대에는 간결성을 띤 시가 오히려 시간을 늘려주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시를 읽을 때 속독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천천히 봐야하고 그 내용들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면에서 시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작가의 이러한 시도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제 증언을 토대로 태어난 ’증언들‘이란 시에서도 나타난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 필사본과 다큐멘터리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 피해자들의 고통이 더욱더 드러난다. 특히 이 작품들은 다른 시들과 달리 세로로 보도록 인쇄됐다. 여백도 많고 띄어쓰기도 각양각색이다.

“’증언들‘은 형태에 신경을 많이 쓴 시입니다. 여백을 많이 사용하고 싶었어요. 시 말고는 여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효과이기도 해요. 이 시들을 다른 분들이 낭독하면 말을 끊어서 하거나 약간 더듬게 되더라고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겪은 피해의 고통을 전하면서, 그걸 읽는 경험도 불편하게 하고 싶었죠.”

작가는 “시들이 할머니들의 증언을 단순히 복제한 것이 아니라 시의 형태로 표현했음을 보다 명확하게 하고 싶어서 다양한 설계를 많이 했다”고 보탰다.

작가는 만 열 살에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한 채 캐나다 유학에 첫발을 디뎠다. 언어를 익히며 겪은 시행착오로 자신의 언어에 엄격하고 과민해졌다. 그러던 중 들었던 창작 수업이 그를 바꿨다. 시는 그를 ’완벽한‘ 언어 구사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고, 그는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작가는 이제 영어로 수필이나 시를 쓰는 것이 더 편하다면서도 자신이 한국어와 영어 모두를 구사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그는 “한국어를 할 수 있어서 영어로 섬세한 글을 쓸 수 있게 됐다고 믿는다. 제 생각을 더 깊게 해석해야할 때면 어떤 단어를 쓸 지, 어떤 소리로 표현할 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 건지 등을 생각했다. 한국어로는 어느 정도인지, 어떤 단어인지 찾고 그에 맞는 영어를 떠올리는 식으로”라고 말했다.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한유주 소설가가 직접 번역했다. 한 작가의 번역은 부당한 역사와 억압의 일상을 단상 위에 올려놓고자 한 에밀리 정민 윤 작가의 다부진 각오에 힘을 보탠 격이 됐다.

윤 작가는 번역에 대해 “기뻤다. 번역한 뒤 단어 선택, 어미 등 세심한 질문들을 많이 해줘서 감사했다”며 “제가 제 시를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더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무슨 일이었을까, 무슨 기분이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이 시를 썼을까 등을 생각하면서 작가로서 충분히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밝혔다.

작가는 미국 유학 중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작품은 대부분 이 기간에 집필한 것이다.

2018년 이미 출간된 미국에서는 ’마음을 사로잡은 데뷔작, 눈을 뗄 수가 없다‘(워싱턴 포스트) 평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김혜순 시인이 ’인류가 가진 모든 구분에 대한 참혹한 조롱의 울부짖음이 됐다‘고 했고 이제니 시인은 “인간의 고통에 공명하면서 연대하게 하는 힘”이라고 평했다.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75주년을 맞는 광복절 전날인 14일 정식 출간된다.

한편 이날 간담회는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진행됐다. 미국에서 한국에 넘어온 작가가 자가격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진행은 허희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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