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 “백두산 천지는 너의 뇌, 태평양은 너의 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0일 16시 00분


코멘트

1920년 4월 1일


플래시백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청년 신문’이었습니다. 연부역강한 젊은 청년들이 똘똘 뭉쳐 엄혹한 시기 민족을 대변했습니다. 창간 당시 장덕수 주간이 26세, 이상협 편집국장이 27세,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도 29세에 불과했으니 요즘 벤처기업이나 스타트업에 견줄 만합니다.

하지만 창간 멤버 중에는 당대 언론계의 거목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을 창간한 석농 유근, 영국인 배설(Bethell)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만든 우강 양기탁 선생이 고문 격인 편집감독으로 활약했습니다. 당시 유근이 59세, 양기탁은 49세로, 까마득한 대선배였습니다. 물론 두 분 모두 실무자는 아니었고, 항일 언론정신을 잇겠다는 뜻으로 모신 것이죠.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던 양기탁은 강직한 외모에 수염까지 길러 감히 범접하기 힘들었지만, 유근은 수시로 후배 기자들과 어울려 내기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등 격의 없이 지냈습니다. 두 편집감독은 나란히 창간호에 동아일보와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유장한 문체로 밝혔습니다.

유근 선생
유근 선생

유근 선생이 집필한 ‘아보의 본분과 책임’은 ‘창천에 태양이 빛나고 대지에 청풍이 불도다…’로 시작하는 창간사 못지않은 명문으로 꼽힙니다. 원문을 여러 번 소리 내 읽다보면 마치 운문(韻文)을 대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는 우선 신이 내린 터, 백두산 천지, 3대 강(압록, 두만, 송화)이 합류해 들어가는 태평양, 독립문의 굳은 돌기둥을 각각 동아일보의 집, 뇌, 피, 그리고 다리에 비유하는 압도적인 스케일로 창간을 자축합니다. 그러나 곧 “동아일보야, 너의 짐이 무겁다”면서 민중의 표현기관, 권리 보호자, 문화 소개자라는 3대 사시(社是)를 다시 한번 일깨우며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지겠다는 의지를 다집니다.

양기탁 선생
양기탁 선생

양기탁 선생의 ‘지아, 부아?’는 1차 세계대전 후 지구촌 곳곳에서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가 퇴조하고 자유와 문화의 훈풍이 불어 한반도에도 민족의 정치적 운동이 크게 일어났지만 마냥 기뻐할 것만은 아니라는 냉철한 분석을 담았습니다. 즉, 세계적 조류에 부화뇌동할 것이 아니라 △국민운동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 △국민운동의 배경에 이상과 지식이 존재하는가 △단단하고 굳센 결심이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며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주의 정책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어 사회를 떠나 정치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정치운동에서 새로운 면목을 이루고자 하면 먼저 사회개조를 기도해야 한다면서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압박을 받았지만 지방조합을 발달시켜 이를 생산과 소비, 금융, 교육에까지 응용해 서로 돕는 벨기에 국민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양기탁 선생은 이 글 외에는 언론인으로서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주지 않고 독립운동에 전념했으며, 유근 선생 역시 창간 다음해인 1921년 5월 20일 자택에서 향년 61세로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동아일보는 21일자 신문에 ‘류근 씨 장서(長逝)’라는 부고를 낸 뒤 22일자에는 ‘조(吊) 석농 유근 선생’이라는 장문의 조사를 1면 머리기사로 올렸습니다. 이 글에서 동아일보는 유근 선생을 잃은 것을 공자가 수제자인 안회를,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명재상인 왕맹을 잃은 것에 비유하며 그의 서거를 애통해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다음날인 23일 1면에 ‘석농 유 선생의 유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지방열(地方熱)을 제거하라’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동서남북으로 갈려 서로 다투는 ‘지방열’을 던져버리고 서로 단결할 것을 호소한 글입니다. 오늘날에도 되새겨야할 유언입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