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아리랑 공연, 항일의 혼 일깨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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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 전진기지 中시안을 가다]<下> 1940년대 문화예술 독립운동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아리랑’ 포스터(위 사진). 1944년 3월 1일 ‘아리랑’이 공연된 부지에 들어선 ‘5·4극원’ 공연장. 시안=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아리랑’ 포스터(위 사진). 1944년 3월 1일 ‘아리랑’이 공연된 부지에 들어선 ‘5·4극원’ 공연장. 시안=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944년 3월 1일. 중국 시안의 중심가에 있는 ‘량푸제 칭녠탕(梁府街 靑年堂)’ 공연장에서는 3·1운동 25주년을 기념해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인 ‘아리랑’이 무대에 오른 것. 항일정신을 담은 이 공연은 5일간 모두 4만 명이 관람해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1940년대 시안은 ‘항일연극’으로 대표되는 문화예술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펼쳐진 터전이었다.

99주년 3·1절을 앞두고 동아일보는 단국대 동양학연구원과 함께 올해 1월 시안에서 문화와 예술로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한국 청년들의 발자취를 확인했다.

시안 시내 중심에 위치한 얼푸제(二府街) 거리. 1939년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자리 잡았던 지역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10분가량 걸어가면 시안의 가장 큰 거리인 장안대로의 한편에 ‘5·4극원’이라는 간판이 걸린 공연장이 나온다. 푸른색 통유리로 마감된 5층 건물로 중국의 3·1운동 격인 ‘5·4운동’을 기념해 새로 설립됐다. 고층빌딩과 국립병원 등이 밀집한 시내 중심에 있지만 최근 공연장으로서 용도가 사라져 건물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었다. 유리문 너머 보이는 건물 안쪽에는 폐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 건물 터가 바로 가극 ‘아리랑’이 울려 퍼진 공연장인 ‘량푸제 칭녠탕’이 있던 곳이다.

최근 ‘한국독립운동세력의 재중 항일예술활동’ 논문을 발표한 양지선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937년 중일전쟁 후 시안이 중국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많은 예술인들이 활동했다. 항일연극을 펼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환경이 마련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안에서 항일연극이 처음 열린 것은 1940년부터다. 1939년 설립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시안으로 옮겨오면서 본격적인 문화예술 선전활동이 시작됐다.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유한(본명 한형석·1910∼1996)이 만든 ‘아리랑’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리랑’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바이올린, 피아노 등 서양악기와 북, 징 등 동양악기 20여 개를 조합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화려한 볼거리와 장엄한 서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향을 등지고 중국으로 건너온 목동과 시골소녀 부부가 항일투쟁을 펼친다는 내용으로, 중국인에게 한국과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지를 고취시켰다. 공연 수익금은 한국과 중국 군대에 군자금으로 전달돼 독립운동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한유한을 포함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인 한국광복군의 제5지대로 합류하며 광복 직전까지 항일 문화예술 활동을 했다. 양 연구교수는 “항일연극으로 확보한 수익금으로 전쟁고아 수백 명을 구제하고 군복 2000벌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은 금전적인 수익과 함께 정신적 무장도 가능하게 해 정치·군사적 방법과 더불어 독립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시안=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시안#아리랑#광복#3·1절#99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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