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동아일보만 보면 그리운 두 얼굴 떠올라…김동연 경제부총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4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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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일보만 보면 떠오르는 그리운 두 얼굴

나와 동아일보-김동연 경제부총리

#2.
50년 전, 서른셋 나이로 돌아가신 아버지.

<가난해 공부를 많이 못한 아버지는>
고향인 충북 음성에서 장사를 하면서 동아일보 보급소장 격인 일을 하셨다.
신문을 받아 손이 새까매지도록 접은 뒤 배달시키는 일이었다.

#3.
그러면서 자유당 독재정권에 저항해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하셨다.

야당에, 동아일보 일까지 하셨으니 순경이 매일 집 앞에서 보초를 서다시피 했다.

#4.
우연히 찾은 아버지의 노트 속 일기에는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된 사연이 있었다.

함께 선거를 도왔던 분이 정치깡패로부터 7차례 폭행을 당한 것을
아버지가 동아에 보도되도록 했다. 이 일로 집안 어른이 아버지를 압박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어렵게 당선된 민주당 후보는 나중에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기까지 했다.
일기 속 이십대 아버지는 피눈물을 많이도 흘리셨다.

#5.
서울에서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일 년에 두세 차례 꼭 동아일보를 방문하셨다.
이재민이 생기거나 가난한 집 아이들 사연이 신문에 실리면 나를 앞세워 구호품을 내러 가시곤 했다.
덕분에 내 이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동아와 인연을 맺으셨다.

#6.
2012년 동아일보에서 ‘죽기 전에 이것만은…’이란 특집을 연재하며 내게 원고를 부탁했다.

1월18일자에 실린 내 글은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버킷리스트 첫 번째에 있던 그 꿈을 이룬 날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리고 나의 두 아들과 철든 남자 대 남자로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새 버킷리스트 맨 윗줄로 올렸다.

#7.
그러나 새 버킷리스트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3년 반 전 큰애가 스물일곱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 그리움이란 단어의 동의어는 큰애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있던 나는 큰애가 떠나고 9개월 뒤 스스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8.
2008년 당시 4학년이던 큰애는 동아일보 제9기 대학생 인턴기자로 뽑혀 동아일보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할아버지 사연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공들여 지원한 덕분이었다.

큰애는 정치부와 스포츠부에서 일하며 나경원 의원과 일본 피겨 선수 아사다 마오 인터뷰도 했다고 한다.
한번은 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국토종단을 하는 대한민국 희망원정대를 취재했는데, 7월 19일자 신문에 큰애 이름이 인턴기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실리기도 했다.

#9.
인턴을 마치며 인턴기자들에게 선물로 만들어준 4면짜리 신문을 가져왔다.
1면에 인턴기자 단체사진이 실렸고 뒷면에는 각자의 소감과 사진이 함께 실렸다.

“인턴을 기자라 생각하고 나의 질문에 성심껏 답해 준 유명 인사들, 그들의 스포트라이트도 기자들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세상 속 호밀밭의 파수꾼, 보이지 않는 진정한 스타는 세상의 이면을 드러낼 질문을 준비하는 기자들이었다.”
(김덕환 인턴기자)

#10.
늘 기자들을 만나며 대변인실에서 신경 쓰는 것 중 하나는 특정 매체에 경사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큰애로 이어진 인연 때문에 남다른 심정으로 동아일보 지령 3만 호 발간을 기다린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축하를 드린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가 26일 3만 번째 신문을 발행합니다.

2018.1.24.(수)
원본ㅣ 김동연 부총리
사진 출처ㅣ동아일보 DB·뉴시스·Pixabay
기획·제작ㅣ유덕영 기자·김채은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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