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관범 교수 “유교와 근대화는 대립개념 아니다” 조선 사상사의 재해석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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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서 ‘기억의 역전’ 펴낸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 교수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 교수는 “서양 근대 사상의 일방적 수용으로 왜곡된 한국 근대 사상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억의 역전’이 필요하다”며 “조선의 전통적 관념들은 현대와도 두텁게 접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 교수는 “서양 근대 사상의 일방적 수용으로 왜곡된 한국 근대 사상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억의 역전’이 필요하다”며 “조선의 전통적 관념들은 현대와도 두텁게 접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갓 쓴 선비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외치자 양복 입은 지식인이 개화를 부르짖으며 논쟁을 벌인다. 20세기가 막 시작되던 전환기 한국의 지식인에 관한 이미지다. 이는 얼마나 사실일까. ‘유교 전통과 서양 근대성의 대립’은 서구적 근대주의가 만들어낸 편향된 서사에 불과하다며 조선 사상사에 새로운 해석을 주창한 연구가 나왔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 교수(45)는 조선 후기부터 광복 뒤까지 사상과 주요 개념의 역사를 추적한 책 ‘기억의 역전’(소명출판·사진)을 최근 출간했다. 유교 전통과 근대는 연속돼 있으며, 서구적 근대성뿐 아니라 전통과 연계된 복수의 근대성을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대한제국 이후 근대적 언론과 교육, 사회운동을 이끈 이들 중 상당수가 유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대한제국의 제도 개혁이 좌절되자 사회단체를 통해 자강(自强)을 모색한 장지연, 사회단체의 사상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며 신(新)도덕을 주장한 박은식, ‘아(我)’라는 새로운 주체를 모색한 신채호 등이 모두 유학적 전통에 선 근대적 지식인이다. 노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들이 시대의 도덕을 새로 정립해 근대화의 주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 건 유교적 사유 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 ‘유교적 신지식인’의 활동은 일본 유학파가 귀국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1920년대 전까지 특히 활발했다.

 노 교수는 책에서 개성에 특히 주목했다. 개성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해 자본주의 맹아론의 모델로 조명돼 왔다. 실학을 근대적 사상의 맹아로 본다면 개성에서는 성리학적 전통과 대립하는 실학이 발흥했어야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노 교수는 “개성에서는 오히려 성리학이 중흥했다”며 “뒤늦게 도시에 형성된 유학 전통을 배경으로 문학과 재력을 겸비한 문인들이 1900년대 신교육 운동과 1910년대 한문학 운동을 이끌었다”고 했다.

 단적으로 개성의 역사와 문화를 서적으로 편찬한 개성 명사 김택영(1850∼1927)과 그의 문화운동을 도운 임규영(1869∼1908), 손봉상(1861∼1936) 등이 그 예다. 손봉상은 개성 삼업(蔘業)조합의 조합장을 지낸 실업가이기도 했다.

 어쨌든 현대에는 유교적 정체성이 단절된 게 아닐까.

 이에 대해 노 교수는 “전통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의 교수들이 전문적 지식의 영역을 넘어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고 현실 참여적인 것도 조선 사대부 정치 문화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책은 근대 전환기 한국의 지식인들이 미래를 근대 중국의 진로에 비춰 고민했다는 점에도 시선을 돌린다. 청나라 말기 근대화운동과 왕정의 붕괴는 동시대 한국 지식인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중국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가 설파한 중국의 진로가 광복 뒤까지도 한반도에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이런 사실이 잊혀지다시피 한 건 조선과 중국은 곧 전통, 일본과 미국은 곧 근대라고 바라보는 근대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결합 탓”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에 관해 그는 “조선의 붕당정치는 공통된 이념 기반의 정치를 실현하고 정치 참여자를 대폭 확장했다”며 “여전히 비선 실세가 권력자와의 사적 인간관계에 힘입어 정치를 사유화하는 작금의 정치가 배울 점도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노관범#기억의 역전#유교#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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