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막이 합의해준 당시 문화재청장 “안된다는 결론 빨리 얻으려고 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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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훼손한 반구대 암각화]변영섭 前청장이 전한 추진경과

“합의에 서명할 때는 ‘가변형 임시 물막이(키네틱 댐)는 안 된다’는 결론을 빨리 얻어내면 문화재청이 주장했던 ‘수위 조절안’으로 정면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박근혜 정부 초대 문화재청장을 지낸 변영섭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65·사진)는 임시 물막이 추진 결정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과학적으로 구현이 불가능한 방안을 전략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지만 국무조정실 등이 강하게 추진하는 방안을 거부하기가 그만큼 쉽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제든 사표를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했다는 변 교수는 임시 물막이 추진이 결정된 그해 11월 경질됐다.

변 교수는 ‘반구대 전문가’로 손꼽혔다. 그는 반구대를 사이에 둔 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이던 201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1시간 30분 동안 반구대 암각화의 가치와 훼손 상황 등을 브리핑했다는 것이다. 변 교수는 “문자가 없던 시절 그림으로 쓴 민족 최초의 역사책인 암각화가 수시로 물에 잠기는 ‘물고문’을 당하면서 4분의 1이나 무너졌다고 설명했다”고 했다.

고래 사냥을 포함한 해상·육상 동물이 모두 그려진 300여 개의 그림이 가로 8m, 세로 2m 크기의 암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 유적이자 세계 최고(最古)의 암각화. 박 대통령도 반구대 암각화의 위기에 큰 관심을 보였던 걸로 변 교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 변 교수가 2013년 박근혜 정부 첫 문화재청장에 임명될 때만 해도 이 문제는 마침내 해법을 찾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갈등 해결은 쉽지 않았다. 변 교수는 사연댐 수위를 낮춰 암각화를 물에 잠기지 않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했지만 울산시 측은 “맑은 물이 부족하다”며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서는 상황에 변함이 없었다.

임시 물막이는 그런 상황에서 등장했다. 2013년 5월 9일 한 중앙 일간지에 생소한 사진과 함께 기사가 하나 실렸다. ‘암각화, 투명한 댐으로 물 차단하면 어떨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함인선 포스코A&C 기술고문이 임시 물막이라고 불리게 되는 ‘트랜스포터블 댐’ 구상을 처음 공개했다. 이 구상은 나중에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 대학원생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번 훼손되면 복구가 불가능한 국보급 문화재 앞에 세우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검증된 적이 없었던 방안. 하지만 이 계획은 불과 한 달여 만에 정부 계획으로 채택됐다 결국 실패로 돌아간 가운데 변 교수는 “의원 시절 두 차례나 사연댐 수문 설치 관련 예산을 반영할 정도로 박 대통령의 애정이 컸는데도 결국 부정직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이 의지를 가진 사안인 만큼 관계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불완전했던 임시 물막이를 추진했던 것에 불과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반구대#문화재#물막이#암각화#변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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