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마에서 조선통신사를 만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9일 1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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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주말을 이용해 지인들과 일본의 시코쿠(四國)를 다녀왔다. 시코쿠는 가가와(香川), 에히메(愛媛), 도쿠시마(德島), 고치(高知) 등 4개현을 말한다. 정직하게는 가가와 현에 다녀왔고, 더 정직하게는 나오시마(直島)에 다녀왔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나오시마가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고, 보낸 시간도 가장 길으니.

그래서 나오시마 얘기를 먼저 하긴 하는데, 인구 3100여명의 작은 섬에 1992년부터 문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지금은 일본과 세계에서 매년 50만 명가량의 관광객이 찾을 정도로 ‘현대 예술의 성지’가 됐다는, 그렇고 그런 얘기는 넘어가고 싶다. ‘나오시마 전설’을 상찬하는 기사는 넘쳐나니까.

다만 이번 여행에서 느낀 점, 두 가지를 공유하고 싶다.

일본의 시코쿠 지방은 세토나이카이를 사이에 두고, 혼슈의 품 안에 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현대 예술의 성지’라는 가가와 현 
나오시마를 방문했다가 400여년 전 나오시마의 앞바다를 지나간 조선통신사 일행의 숨결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일본의 시코쿠 지방은 세토나이카이를 사이에 두고, 혼슈의 품 안에 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현대 예술의 성지’라는 가가와 현 나오시마를 방문했다가 400여년 전 나오시마의 앞바다를 지나간 조선통신사 일행의 숨결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하나는,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총지휘자인 후쿠다케 소이치로(福武總一郞) 베네세홀딩스회장 겸 후쿠다케재단이사장을 다시 보게 됐다는 사실이다(나만 그에 대해 무지했다면 용서를 바란다). 우리는 ‘나오시마’하면 곧바로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와 땡땡이 호박의 설치미술가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 한국화가 이우환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오시마, 세토우치 아트의 낙원’이라는 책을 사서 후쿠다케 회장이 쓴 서문을 읽으며 여러 번 ‘역시!’라고 생각했다.

‘역시!’라고 하는 것은 궁금했던 나오시마의 성공비결을 어렴풋이 깨닫게 됐고, 후쿠다케 회장의 역할이 생각보다 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뜻이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작가들의 공을 깎아 그에게 얹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후쿠다케 회장이 나오시마와 오래 전부터 인연이 있었고, 문화에 대한 철학이 있었고,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고, 더욱이 재력이 있었기에 나오시마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그는 재력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성공을 말하며 초창기 재정지원을 빼놓고 얘기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그럼,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을씨년스럽게 변해가던 나오시마를 ‘문화 예술의 성지’로 바꿀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꿈과 의지다.

그는 나오시마 바로 건너편의 오카야마(岡山)현에서 창업한 후쿠다케서점의 도련님으로서 갑자기 별세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고, 사업영역을 확대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 듯하다. 그를 알고 있는 어느 한국인에 따르면 그는 노인요양시설을 많이 건설해 큰 돈을 벌었고, 미술품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 가끔 한국을 찾는다고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고의 건축가에게 의뢰해 외딴 섬에, 그것도 땅속에 미술관을 짓고 거장의 작품들을 전시하겠다는 발상(地中미술관), 별로 손님이 올 것 같지도 않은 곳에 미술관과 숙박시설이 함께 들어있는 건물을 짓겠다는 발상(베네세하우스),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현대미술의 최첨단 작업실로 바꿔보겠다는 발상(이에(家)프로젝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꿈과 의지와 자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는 꿈을 꿨고, 꿈에 의지를 실었고, 의지에 돈을 투자했다. 후쿠다케 회장은 ‘후쿠다케서점 그룹’이라는 회사이름까지 ‘베네세 그룹’으로 바꿨다. 라틴어로 ‘베네’는 ‘좋다’, ‘에세’는 ‘산다’는 뜻. 결국 ‘잘 산다’는 뜻인데, 이는 세속적 의미에서 ‘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경제는 문화의 머슴’이라는 그의 철학을 실천하겠다는 소신의 표현일 듯 하다.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 나오시마에는 ‘붉은 호박’과 ‘노란 호박’ 두 개가 있다. 사진 속의 ‘노란 호박’은 섬의 
남쪽에서 늘 태평양을 바라보며 좌선 중이고, ‘붉은 호박’은 섬의 관문인 미야노우라 항 페리선착장 옆에서 손님을 맞고 보낸다. 두
 놈 모두 인기가 높다.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 나오시마에는 ‘붉은 호박’과 ‘노란 호박’ 두 개가 있다. 사진 속의 ‘노란 호박’은 섬의 남쪽에서 늘 태평양을 바라보며 좌선 중이고, ‘붉은 호박’은 섬의 관문인 미야노우라 항 페리선착장 옆에서 손님을 맞고 보낸다. 두 놈 모두 인기가 높다.
덧붙이자면, 이우환미술관에 관한 얘기다. 이우환미술관은 지중미술관과 베네세하우스의 중간에 있다. 후쿠다케 회장은 이 씨에게 제공한 미술관 자리에 대해 “소위 ‘최후의 장소’로서 지금껏 소중히 간직해 왔던 에어리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우환 미술관 자리가 명당이라는 것보다 그가 이우환이라는 작가를 평가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이 씨는 일본 미술계에서 시작된 ‘모노하(物派)’라는 새로운 웨이브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작가로 평가받는다. 일본에서 ‘모노(物)’는 물건을 뜻한다. 나에게 모노하를 이해할 만한 지식은 없다. 다만 그의 언론 인터뷰 중 그래도 내 수준에 맞는 대목은 이것이다. “너무 많은 것이 만들어져서 포화 상태에 있는 지구를 바라보며, ‘만드는 것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한다. 그래서 물건을 덜 가공하거나 덜 만들고, 이를 시간이나 공간과 관련시키며, 이런 방식으로 예술을 다시 생각해보자며 출발한 것이 ‘모노하’다.” 인간 중심의 오만함을 버리고, 물건 그 자체의 존재가치에도 눈을 돌리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후쿠다케 회장은 이 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노하’의 작가로 불리고 있으나 나는 그의 작품에서 물질문명에 대치하는, 선(禪)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나오시마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중략) 지중미술관이 서양적인 ‘성지’라고 한다면, (이우환미술관은) 그것에 대응하는 동양적인 존재로 만들려는 구상이다.” 이 씨의 작품을 ‘모노’가 아니라 동양의 선(禪)과 연결한 것은 심플하면서도 내공이 있는 코멘트가 아닌가.

나오시마라는 이름의 유래도 재미있다. 115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정의 권력다툼에서 패한 스도쿠상황(崇德上皇)이 사누키(讚岐·지금의 가가와현. 사누키 우동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로 유배를 오다가 이 섬에 들렸는데, 백성들이 너무 순진하고 착해서 ‘곧을 직(直)’자를 붙여 ‘곧은 섬’(直島·나오시마)으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지금은 直자를 달리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곧을 직자가 들어간 타동사에는 ‘直す(나오스)’가 있고, 자동사에는 ‘直る(나오루)’가 있다. ‘나오스’는 고치다, 치료하다는 뜻이고, ‘나오루’는 낫다, 복구되다의 뜻이다. 요즘의 나오시마의 상황과 딱 들어맞지 않는가. 문화예술은 제련소와 공해로 병들어가던 섬을 열심히 치유하고 있고, 주민들도 이에 호응해 섬은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직도(直島)는 이제 순박한 섬이 아니라 치료해서 낫고 있는 섬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니오시마는 ‘욕심이 많은’ 섬이기도 하다. 섬을 떠나는 배 안에서 본 포스터 때문이다. ‘나오시마의 조용한 밤’이라는 시가 있었다.

“밤이 내려온다/사위가 온통 조용해진다/눈을 감고 귀를 연다//저 멀리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뱃소리/산에 부딪혀 돌아오는 큰북소리/즐거운 듯 노래하는 벌레소리/고개 들면 아름다운 별하늘/수면에 흔들리는 섬, 섬/밀물 썰물의 향기와 풀꽃의 냄새//그 때, 처음으로 가슴이 뛴다//조용한 밤에만/나오시마가 ‘맨얼굴’을/보여준다.”

그럼, 우리가 낮에 본 것은 화장한 얼굴이었나, 낮에도 감동한 것은 또 뭐였지. 그게 무슨 대수랴. 이 포스터는 나오시마의 강한 자신감의 표현일 뿐이다. 낮에도 밤에도 나오시마는 매력적이라는….

그 자신감의 언저리에서 꼭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나오시마는 분명 후쿠다케 같은 감독의 카리스마와 안도 다다오, 쿠사마 야요이, 이우환 같은 명배우들의 재능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유명해진 사람은 없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다. ‘유명해진다’는 말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오시마의 경우, 이 섬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누군가는 바로 관광객들이다. 후쿠다케 회장은 말했다. “나는 그림이 주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주역은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오시마는 이제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혹시 나오시마 자체가 그림이 되고 주역이 되고, 관광객은 관객이 되고 조연이 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함께 여행을 했던 어느 지인의 딸(22)은 지금 일본 명문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이다. 그에게 나오시마의 인상을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만한 곳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그의 견해를 존중한다. 젊은이들이 어른들과 다른 시각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나오시마의 성공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초심을 잃지 말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나오시마 혼무라의 ‘이에(家)프로젝트’를 둘러보다 발견한 어느 가정집 대문기둥.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을 연상시키는 작은 호박 두 개가 놓여 있다.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과 이방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의 표시가 아닐까.
나오시마 혼무라의 ‘이에(家)프로젝트’를 둘러보다 발견한 어느 가정집 대문기둥.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을 연상시키는 작은 호박 두 개가 놓여 있다.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과 이방인을 향한 따뜻한 마음의 표시가 아닐까.
에피소드도 하나. 안도 다다오를 우연히 만난 경위다. 그는 6월 25일 오후에 ‘이에(家)프로젝트’로 유명한 혼무라(本村)의 ‘안도 뮤지엄’에서 두 차례, 자신이 설계한 미술관 겸 호텔인 베네세하우스에서 한 차례 강연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혼무라에 왔던 것 같은데, 마침 그 곳에 있던 우리 일행이 ‘안도 뮤지엄’으로 들어가는 그를 발견했다. 그래서 따라 들어가 자신의 책을 산 관광객을 위해 속표지에 사인을 하고 있던 안도 씨에게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기자라는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같이 사진을 찍고 싶은데 그래줄 수 있는가.” 그도 정중하게 거절했다. “예전에 그런 적이 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안 되겠다는 뜻이었다.

안도 씨에 대한 섭섭함은 뒤로 하고, 나오시마에서 두 번째로 느낀 것을 얘기해야겠다. 느꼈다기보다는 생각한 것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나오시마 지도를 보다가 갑자기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혹시 이 섬 앞으로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것은 아닐까. 그것은 부산을 출발한 조선통신사가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해 처음 일본 본토를 밟은 뒤 오사카(大阪)까지 가려면 반드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지나야 하는데 나오시마도 세토나이카이에 속한 섬 중의 하나라서 그랬다.

더 결정적인 것은 나오시마에서 그리 멀지 않는 오카야마현 세토우치(瀨戶內)시에서 ‘우시마도(牛窓)’라는 항구 이름을 본 것이다. 우시마도는 ‘일본의 에게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매년 11월 셋째 일요일에 ‘에게해 페스티벌’을 벌이는데 가장 중요한 이벤트가 조선통신사행렬의 재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다(시코쿠 사람들은 세토나이카이를 ‘일본의 지중해’라고 하는데, 혼슈 사람들은 더 잘게 나눠 ‘에게해’라고 쓰니, 재미있다).

시코쿠에 가면 흰 가운 걸치고 삿갓 쓴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본인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홍법대사(774~835년)와 
인연이 있는 88개 사찰을 돌며 소원을 비는 순례자들이다. 아무렇게나 도는 게 아니라 순번이 붙어 있다. 도쿠시마(23개)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고치(16개) 에히메(26개)를 거쳐 가가와(23개)에서 끝난다. 불력이 높은 스님은 입적하신지 
1200년이나 돼도 중생을 인도한다.
시코쿠에 가면 흰 가운 걸치고 삿갓 쓴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일본인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홍법대사(774~835년)와 인연이 있는 88개 사찰을 돌며 소원을 비는 순례자들이다. 아무렇게나 도는 게 아니라 순번이 붙어 있다. 도쿠시마(23개)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고치(16개) 에히메(26개)를 거쳐 가가와(23개)에서 끝난다. 불력이 높은 스님은 입적하신지 1200년이나 돼도 중생을 인도한다.
조선통신사는 조선 후기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4년 동안 12차례 일본에 파견됐던 외교사절단이다. 1811년 마지막 사절단은 쓰시마까지만 왔다가 돌아갔으니 세토나이카이를 지나간 것은 11번이고 이중 8번을 우시마도에서 숙박했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보통 450여명으로 그 속에는 학문과 음악, 그림과 글씨 등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니 사실은 외교문화사절단으로 부르는 게 더 적확할 듯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선통신사는 나오시마의 위든, 옆이든, 아래든 어딘가를 지나 우시마도로 간 게 틀림없다. 통신사 일행을 태운 배는 가능하면 연안에 붙어 항해했다는 기록에 따르면, 나오시마 북쪽을 거쳐 갔을 가능성이 높다. 멀리 400년 전에 조상들이 내가 지금 내려다보고 있는 바닷길을 지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과장해서 가슴이 뛰었다.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고?

“호화찬란한 대형 목조선 6척과 일본 측의 선도선이나 호위선 약 1000척이 나란히 달리는 모습은 바다의 일대장관이었다. 세토우치 연안의 백성은 위로부터 (선단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지만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수많은 구경배를 타고 나갔다. 때로는 통신사 배에 부딪혀서 침몰당할 뻔하면서도 선상의 통신사 일행에게 글을 요구하기도 하고, 함께 샤미센(일본의 세 줄짜리 전통 악기-필자 주)과 조선악기를 연주해서 음악교류를 즐기기도 했다.”(한류의 원점을 찾아서, 신기수와 조선통신사의 시대)

조선통신사가 일본 백성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러니 조금 흥분한들 흉이 될 게 없다. 인용한 책은 우에노 도시히코(上野敏彦) 교도통신 논설위원이 2005년에 쓴 것으로 조선통신사를 역사의 뒤안길에서 햇볕 속으로 끌어내는 데 큰 업적을 남긴 재일동포 신기수(辛基秀·2002년 작고) 선생의 평전이다. 신 씨는 식도암 수술 때문에 필담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우에노 논설위원이 “‘리틀 서울’이라고 불리는 도쿄의 신오쿠보에서 일한의 젊은이들이 공동월드컵을 보며 대단히 신이 났다”고 하자, 신 씨는 “마치, 현대의 통신사가 오가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그리고 신 씨는 몇 달 뒤 세상을 떠났다.

통신사중 고위직인 정사, 부사, 종사관 등 3사를 한명씩 태운 대형목조선 3척과 수행원들을 태운 다른 3척의 대형목조선,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는 1000척의 배가 일제히 물살을 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장관이었으면 일본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라도 보고 싶어 했을까. 일본인은 우리가 다도해를 사랑하는 것만큼 세토나이카이를 사랑한다. 물 잔잔하고, 섬 많아 풍광 아름답고, 먹을 것 풍부한 곳으로. 그러니 조선통신사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세토나이카이를 제대로 크루즈한 첫 외국인그룹일 것이다. 그것도 국빈대접을 받아가면서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통신사는 적어도 5,6일을 세토나이카이의 연안 항구에서 묵었다.

조선통신사는 앞에서 봤듯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해 ‘한류의 원점’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대규모 사절단을, 이처럼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파견한 예는 없다. 한일 양국의 민간단체들이 공동으로 지난 3월 30일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신청한 이유다(이 분야에서는 한일협력이 그런대로 잘 이뤄지고 있다).

아 참, 우시마도를 이야기하면서 오카야마 번주(藩主)였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우키타는 숨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홉 살에 영주가 되고 19살 때 임진왜란에 출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충복이었다. 그러나 1593년 행주대첩에서 권율장군에게 대패하고 부상을 입은 채 철병한다. 그의 이름은 행주대첩 안내문에도 나온다. 조선과의 악연이 있는 그가 자기 땅의 우시마도에 조선통신사가 머무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러나 조선통신사가 우시마도에 왔을 때 그는 유배를 가고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를 놓고 최후의 일전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는 도요토미 쪽에 섰고, 결국 패했다. 할복을 면한 것 만도 다행이었다.

나오시마와 조선통신사의 인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에 없는 새로운 시도이고, 문화가 최대의 키워드이며, 그런 매력이 사람을 불러 모으고, 국경을 넘어서 영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두 나라가 전쟁이 끝난 지 불과 9년 만에 조선통신사를 통해 국교를 회복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 경험을 잘 살펴 오늘에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미 그런 점에 착목한 일본의 젊은 예술가 그룹이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그들은 요코하마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BankART라는 예술가그룹, 2010년에 ‘續·조선통신사 2010’라는 팀을 꾸려 세토나이카이에서 열린 첫 번째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에 참석했다. 그때 물론 나오시마도 방문했다. 트리엔날레는 3년마다 열리는 행사라는 뜻인데 이 팀은 2013년에도 참가했고, 올해도 참가한다. 조선통신사는 콘텐츠의 보고다. 한국도 종종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걷는 프로그램이나 행사를 벌였지만, 콘텐츠를 현대에 되살려 진화시키는 고민은 덜 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BankART의 시도는 신선하다.

이번 여행에서 들렀던 다른 몇 곳에 대한 단상들도 언급하고 싶다.

우선, 효고(兵庫)현의 아와지시마(淡路島). 우리 일행은 둘째날 밤을 이곳 호텔에서 투숙했고, 다음날 오전에 간만의 차이가 심해 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나루토(鳴門)해협을 배로 관광했다. 나루토 해협은 우리의 명량(울돌목)과 비슷하다. 관련 지자체와 단체, 주민들은 이 소용돌이를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효고·도쿠시마 나루토의 소용돌이 세계유산등록추진위원회’를 만들고 포럼을 여는 등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루토 해협이 아니라 아와지시마다. 이곳은 1995년 1월 17일 오전 규모 7.3의 대지진이 발생했던 곳으로 나중에 붙은 지진의 이름은 ‘한신·아와지 대지진.’ 한신(阪神)은 오사카(大阪)와 고베(神戶)를 합친 말. 큰 도시 이름 뒤에 아와지시마라는 작은 동네 이름이 붙은 것은 지진이 바로 이 섬의 북쪽에 있는 활성단층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6434명이나 됐다.
가가와 현 현청이 있는 다카마쓰 시에서 서남쪽에 있는 고토히라 궁. 바다의 신 ‘사누키 곤피라’를 모시는 곤피라 신사의 
총본산이다. 136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초입에 세워 둔 수 십 개의 석등이 눈에 띈다. 석등의 앞뒤에는 
‘고토히라 궁’을 소재로 한 소설과 시 구절을 새겼다.
가가와 현 현청이 있는 다카마쓰 시에서 서남쪽에 있는 고토히라 궁. 바다의 신 ‘사누키 곤피라’를 모시는 곤피라 신사의 총본산이다. 136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초입에 세워 둔 수 십 개의 석등이 눈에 띈다. 석등의 앞뒤에는 ‘고토히라 궁’을 소재로 한 소설과 시 구절을 새겼다.

배를 타러 후쿠라(福良) 선착장에 나왔을 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그런 큰 재난을 당한 곳에 아무 것도 없을 리가 없다. 그러면 일본이 아니다.’ 안내 데스크를 보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 이 곳이 20여전에 큰 재난을 당한 한신·아와지의 그 아와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하겠네요.”

“다 복구가 되기도 했지만, 특정 장소에서만 피해가 컸으니까요.”

“특정 장소라 하면?”

“잠깐 기다리세요.”

그러면 그렇지, 그녀는 내게 지진이 처음 발생했던 장소를 소개하는 팜플렛을 전해줬다. 팜플렛의 이름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노지마(野島)단층-호쿠탄(北淡)지진기념공원.’ 풀이하자면 ‘진앙지인 아와지시마 북쪽의 노지마 단층을 국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이를 후세를 위한 교육장소로 삼기 위해 기념공원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의 아픈 곳을 물어 조금 거시기했는데, 그녀는 “요즘 한류드라마에 빠져 잠을 설치고 있다”고 말해 내 미안함을 조금은 덜어줬다.

나루토해협 관광에 사용하고 있는 간린마루호. 500명까지 탈 수 있다. 이 배는 1860년 일본 막부대표단이 그 2년 전에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미국으로 갈 때 사용했던 배의 이름과 모양을 본 따 만든 것이다. 그 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개방으로 나아가니 150년 전 간린마루는 쇄국과 개국의 과도기를 목격한 셈이다.
나루토해협 관광에 사용하고 있는 간린마루호. 500명까지 탈 수 있다. 이 배는 1860년 일본 막부대표단이 그 2년 전에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미국으로 갈 때 사용했던 배의 이름과 모양을 본 따 만든 것이다. 그 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개방으로 나아가니 150년 전 간린마루는 쇄국과 개국의 과도기를 목격한 셈이다.
소용돌이를 보기 위해 탔던 간린마루(咸臨丸)라는 배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은 1854년 미국 페리제독의 협박으로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결국은 강제개항을 하고 만다. 또 1858년에도 역시 불평등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일본은 이때 미국으로부터 배운 나쁜 수법을 한국침략 때 그대로 써먹는다). 간린마루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위해 1860년 막부 대표단이 미국으로 갈 때 이용했던 목조 서양식 범선 군함이었다. 지금 나루토 관광에 쓰고 있는 배는 150년 전의 그 배를 본 따 만든 것이다.

당시 이 배에 탔던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배의 선장은 하급무사 집안 출신으로 바다를 열고 무역을 통해 국부를 쌓아야 한다고 주장한 가쓰 가이슈(勝海舟), 그리고 나중에 일본 최고의 사상가, 교육자, 저술자가 되고 탈아입구론을 통해 일본의 조선과 중국 병합론의 논거를 제시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4살 때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고 미국 배에 구조됐으나 쇄국정책을 펴던 막부정권 때문에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10년간 살면서 공부까지 하고 돌아온 존 만지로가 있었다.

비록 이 배에는 타지 않았지만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가쓰 가이슈를 사사한 막말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다. 사카모토는 개방을 주장하는 가쓰를 살해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가 오히려 설복당했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사카모토는 일본을 존망의 위기에 구하기 위해서는 번끼리의 싸움을 중지하고 막부의 권한을 천왕(일왕)에게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꿈같은 얘기였으나 그는 당시 가장 힘이 셌던 사쓰마번과 초슈번의 동맹(삿초동맹)을 이끌어 내고 막부까지 설득해 결국은 정권을 조정에 반납(大政奉還)하는 대단한 일을 성사시킨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튼 것이다. 그러다 이에 반발하는 세력에게 33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을 당하면서 그는 더 유명해졌다. 요즘도 최근 1000년 동안의 인물을 대상으로 ‘총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조사하면 부동의 1위가 바로 그다. 그의 고향이 바로 시코쿠의 아래쪽인 고치현(당시에는 도사번·土佐藩)이었고, 그의 꿈은 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떠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간린마루는, 강제로 수술대에 놓였지만 수술 후에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재활운동을 해서 제국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는 일본의 격변기를 상징하는 배가 아닐까. 여기서 국가의 흥망은 당연히 주변정세의 영향을 받지만, 미래를 읽고 현재를 바꾸려는 리더나 집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양지차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사카모토에 비견할 만한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간린마루의 갑판에서 거친 바람을 맞으며 잠시 그런 생각을 해봤다.

마지막으로 다카마쓰(高松) 시내에 있는 특별명승지 리쓰린 공원(栗林公園)에 관한 것이다. 일본문화제보호법에 따라 특별명승지로 지정된 정원은 다이묘정원 6곳, 사원정원 13곳, 기타 5곳 등 24곳뿐이니 리쓰린 공원은 꽤나 유명한 정원임에 틀림없다. 단, 공원이름의 유래가 된 밤나무는 1850년 청둥오리 사냥을 위해 모두 베어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정원의 훌륭함이 아니라, 공원을 둘러볼 때 일행이 말했던 자연 대 인간, 자연 대 부자연에 관한 것이다. 쉽게 말해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인간의 의지에 맞춰 강제로 자르고, 당기고, 구부려뜨리는 걸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이 예술적, 철학적 문제도 내 머리가 답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그런데, 뭔가 핑하고 머리를 스치는 게 있지 않은가. 이우환 씨의 ‘모노하’와 관련해서다. 만약 이 씨에게 정원을 맡겼다면, 그는 ‘모노하’의 정신에 따라 가능하면 나무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의 멋을 살리면서도 주변과 조화를 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이런 발상이 필요해서 요즘 인문학적 소양과 융·복합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리쓰린 공원 내의 화장실. 주변 지역에서 나온 기와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화장실 분위기도 좋아지고, 한번이라도 눈길을 안 줄 수 없도록 만든 아이디어가 좋다.
리쓰린 공원 내의 화장실. 주변 지역에서 나온 기와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화장실 분위기도 좋아지고, 한번이라도 눈길을 안 줄 수 없도록 만든 아이디어가 좋다.
리쓰린 공원을 관람하고 난 다음날 아침 호텔방에서 우연히 시청한 NHK 방송의 일부가 떠오른다. 마침 일본 분재계의 젊은 호프, 우루시바타라는 사람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현실을 알게 됐다. 일본 분재산업은 쇠락해 일이 거의 없다, 젊은 사람들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오히려 해외에서의 일이 늘고 있다, 외국에서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일본에 온다는 것 등등. 우루시바타 씨도 해외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고, 스페인 출신 젊은이를 제자로 두고 있다.

이것이 우리 일행의 질문에 대한 답은 되지 않을 것이다. 프로그램 중에 그의 스승을 소개하면서 “줄기까지 틀어 버리는 과감한 시도를 했던 분재의 혁명가였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들은 나무를 변형시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드는데 대해서는 거부감이나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또, 외국에서 일감이 늘고 있다는 것은 외국인들도 ‘초목 학대’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엷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언급하고 싶은 것은 대규모 정원의 잘 관리된 나무들은 분재라는 ‘기술적 관점’에서만 봐선 안 되고, ‘시간의 무게’를 얹어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즉 오늘의 분재는 아프기만 하지만, 내일의 분재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서없이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다. 마지막까지 꼭 읽어야 할 글도 아니라는 말로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글이나마 쓸 수 있도록 지적 자극을 준 일행에게 감사드린다. 그 일행은 고려대 언론대학원(원장 심재철) 최고위과정 제45기 학생과 그 가족 등 19명이다(이번 교육 과정의 키워드는 ‘문화와 미디어’였고, 6월 24부터 2박3일간의 일본 문화 탐방은 그 일환이었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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