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사람들①] 어린 자식을 눈앞에 두고…생이별하던 ‘수탄장’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5월 10일 05시 45분


섬사람이 된 부모와 자식들은 ‘수탄장(愁嘆場)’에서 한 달에 한 번 재회하고 이별했다. 부모들(오른쪽)은 자식을 걱정했고, 자식들(왼쪽)은 부모 품에 안기려 애썼다. 그래서 바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었을 터이다. 사진은 수탄장 안내판을 촬영한 것이다.
섬사람이 된 부모와 자식들은 ‘수탄장(愁嘆場)’에서 한 달에 한 번 재회하고 이별했다. 부모들(오른쪽)은 자식을 걱정했고, 자식들(왼쪽)은 부모 품에 안기려 애썼다. 그래서 바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었을 터이다. 사진은 수탄장 안내판을 촬영한 것이다.
누구는 ‘천형의 땅’이라고 했다. 또 누구는 ‘아픔의 섬’이라고 말한다. 천형처럼 내려앉은 아픔과 설움의 흔적이 여전하기 때문일까.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 마치 “어린 사슴의 모양을 닮아”(小鹿島, ‘소록도 80년사’·국립소록도병원 펴냄) 붙여진 이름은 그러나 한센병과 그 후유증 혹은 합병증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문둥병’이란 이름의 소외와 차별, 멸시의 아픔을 감당해낸 섬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듯하다. 1916년 일제가 나환자 격리 정책에 따라 이 곳에 자혜의원을 세운 지 100년. 소록도엔 여전히 그 오랜 세월이 남긴 상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네 차례에 걸쳐 싣는다.

격리된 부모·자식들, 매달 한번씩 만났던 곳
“바람따라 감염” 편견에 바람 맞고 선 부모들
눈물범벅 자식 안아보기는 커녕 말도 못 건네
15세가 되면 사회로…‘영원한 이별’ 했었죠

질곡은 병을 앓는 이의 것만은 아니었다. 전염과 유전의 편견 안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올해 칠순을 맞은 김상범(가명)씨와 그 가족의 아픔도 그랬다.

김상범씨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12살 어린 나이에 병을 앓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생은 친구에게 집에 가서 함께 놀자고 했다. 친구는 “너그 집에 가면 안 된댜”며 고개를 저었다. 그 부모가 어느새 이웃집 아이 김씨의 발병 사실을 눈치 챈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김씨의 가족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병원을 찾아 “대풍(大風, 한센병의 한방 표현)이 맞다”는 진단을 받았다. 결국 김씨는 부모의 부탁을 받은 사돈의 손에 이끌려 또 다른 이들이 격리 치료를 받고 있던 전북 전주의 소생원으로 향했다. 이미 소록도가 있었지만 “거그 가면 다 죽는 걸로 생각했다”. 갈 수 없었다. 하지만 소생원은 아직 어린 나이의 초기 증세였던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씨는 고향인 남도의 어느 땅(김씨는 자신의 고향조차 밝히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향 동네에 이미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갈 곳은 결국, 소록도뿐이었다. 1959년이었다.

생이별이 따로 없었다.

● 수없이 어린 눈물들

“해질녘이 되면 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 참 마이 울기도 혔어요.”

뉘엿뉘엿 지는 득량만의 해를 바라보며 김씨는 고향과 부모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직 부모의 품에서 어리광을 피울 나이에 그는 서러움의 울음을 울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이번엔 동생이 소록도를 찾았다. 큰아들을 소록도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둘째 아이의 옷을 벗기곤 했다. 혹여 형으로부터 병을 얻은 건 아닌지 염려한 때문이었다. 몸의 조그만 이상이 발견된 뒤 어머니는 기어이 동생까지 형의 곁으로 보냈다. 다행히 동생은 그 고난의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래도 소록도는 아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형제는 그렇게 2, 3년을 함께 있었다.

김씨는 1968년까지 소록도에서 거주하며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는 섬을 떠났다. 말끔해진 몸으로 군 복무까지 마쳤다. 몸을 놀려야 먹고 살 수 있었다. 일을 했다. 삶의 힘겨움은 노동에 지친 몸에 다시 병을 일으켰다. 1977년 재입원했다.

그러는 사이, 김씨는 부모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아들을 소록도로 보낸 부모는 고향땅을 떠나야 했다.

“생면부지의 고장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리고 10년 정도 떠돌이 생활을 했지요. 아버지는 남의 집살이를 살았어요. 선주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생선을 내다팔며 생계를 이었다고 하등마요.”

김씨는 젊은 시절 고향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고향을 떠난 부모를 만날 수는 없었다.

“대놓고 찾을 수는 없고, 몰래 만나려고 했는디 못 봐부렀어요.”

그래도 부모를 원망한 적 없다.

“단 한 번도 그라지 않았어요. 부모님도 살기 바쁘니께 그랬겄지요. 또 남들이 알면 안 되는 일이니께.”

얼굴 곳곳에 희미하게 내려앉은 분홍빛 반점은 김씨가 겪은 불운의 병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를 권해오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에 힘겨웠다.

수탄장(愁嘆場)의 설움

생이별은 섬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았다.

병든 부모와 함께 섬에 들어왔거나, 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감염의 우려로 인해 5살이 되면 부모와 헤어져 직원지대 쪽에 자리한 미감아(未感兒) 보육소에서 살았다.

‘미감아’. ‘병 따위에 아직 감염되지 아니한 아이’라고 설명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은 그 뜻풀이에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아 두었다. ‘특히 나환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를 이른다.’

말은 세상일진대, ‘미감아’는 그대로 소록도가 되었다.

약 300여명의 아이들이 보육소에 머물러 있었던 1961년에 국립소록도병원장에 부임한 조창원 전 원장은 “영아 전염을 100% 예방하려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부모와 격리시키는 게 옳은 방법이다. 부모와 5살까지 같이 살게 하다가 이후에 수용소로 격리시키는 관례는 의학상식적으로도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영아들을 보살피기 힘들다는 이유로 5살까지 부모들 품에 맡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조창원의 소록도 이야기’, 2008년 1월8일자 평화신문)고 술회했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1950년대 이후 오랜 시간 생이별하고 또 생이별하곤 했다. 설움은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왔다. 그 눈물과 슬픔과 설움이 뒤섞인 “근심과 탄식의 장소”(위 신문)가 바로 수탄장이라 이름 붙여진 공간이다.

이제 섬 바깥과 소록도를 연결하는 도로가 된 옛 수탄장. 왼편에서 불어오는 바다의 바람과 길게 뻗은 소나무가 오랜 설움을 일러주는 듯하다. 섬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출입통제 바리케이드는 섬 안팎을 가르는 경계가 되고 있다. 소록도와 녹동 잇는 소록대교 위로 차량들이 내달리고 있다. 오른쪽 보이는 섬이 소록도이다.(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이제 섬 바깥과 소록도를 연결하는 도로가 된 옛 수탄장. 왼편에서 불어오는 바다의 바람과 길게 뻗은 소나무가 오랜 설움을 일러주는 듯하다. 섬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마을 입구에 세워놓은 출입통제 바리케이드는 섬 안팎을 가르는 경계가 되고 있다. 소록도와 녹동 잇는 소록대교 위로 차량들이 내달리고 있다. 오른쪽 보이는 섬이 소록도이다.(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소록도(고흥)|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병보다 동상이 더 아팠던 시절

소록대교를 빠져나와 국립소록도병원 쪽으로 굽어 내린 길을 따라가면 안내소로부터 병원을 향해 뻗은 길. 병사지대와 직원지대를 가르는 “철조망을 기준으로 병사지대 쪽 어른들이 먼저 2미터의 거리를 물러섰다. 군데군데 감시 직원이 배치되고, 이쪽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 육친을 찾아 철조망 앞으로 다가섰다. 아이들 역시 철조망을 기준해서 2미터 거리를 표시한 직선 위에 일정하게 발을 머물러 섰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섬이 생긴 후로 수많은 애화와 비원을 남긴 그들의 오랜 풍속이 다시 한 번 반복되기 시작했다.”(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중에서)

부모는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며 애끊는 안부를 물었다. 감시 직원들의 소홀한 시선을 눈치껏 피해서는 힘겹게 번 돈을 철조망 사이로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절박한 눈물콧물을 흘렸다.

부모와 자식의 자리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뒤바뀌었다. 부모는 바람을 맞았고, 자식은 바람을 등졌다. 부모의 질곡이 바람을 타고 자식에게 옮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섬과 병원을 관리하는 직원들은 물론 전문 의료진조차 그 질곡에 대한 편견에서 헤어나지 못한 때였다.

실제 발병하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그래도 어떤 아이들은 부모 품이 그리워 병을 얻으려 무던히도 애썼다. 그럴 때마다 도리어 추운 겨울 동상으로 더 아팠다.

탄식과 설움의 철조망은 1974년에야 철거됐다. 한 해 앞서 미감아 보육소도 문을 닫았다. 부모와 자식의 “풍속”도 그렇게 사라졌다.

그래도, 그래도 부모와 아이는…

아이들은 병을 앓는 부모들과 생이별한 채 보육소 분교와 중학교에서 초중등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5세가 되면, 물론 감염되지 않았다는 진단 결과를 전제로, “(대구의)국립삼육학원 또는 친척을 통하여 사회로 진출”(국립소록도병원 ‘소록도 80년사’)했다.

소록도 주민자치회 강선봉(77) 감사도 미감아 보육소에서 자라났다. 강 감사는 “아이들이 삼육학원에 갈 때쯤 되면 철조망을 넘어 밤에 엄마한테 가. 관리자들도 눈 감아줬어”라고 돌이켰다.

“부모 그리워하지 않는 자식 없고, 또 안 그런 부모도 없잖아. 제도가 그리 되어 있는 거지.”

아이들은 짧고 짧은 시간, 엄마를 경험하고 대구로 향했다.

“그거야말로 영원한 이별이지. 학교를 졸업해야 직장을 구할 수 있잖아. 일을 해 돈을 벌고 차비가 생겨 부모를 만나러 오지만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야. 부모가 아이를 찾아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지.”

부모와 아이들은 질병으로 헤어지고, 질병을 피해 만났다. 질병은 부모와 아이들을 영원히 갈라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당국은 전염과 유전을 핑계로 섬사람들이 아기를 낳지 못하도록 했다. 한때는 강제 단종수술을 택했다. 결혼을 하려면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신의 삶을 살았다. 김상범씨는 “현재 이 섬에 사는 550여명 가운데 독신이 절반가량 된다”고 말했다.

그래도 생명은 질겨서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생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부모는 자신들에게 내린 운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김상범씨는 “자녀를 낳은 부모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다시 섬으로 들어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 CLIP. 한센병은?

과거 ‘나병’이라고도 했다. ‘문둥병’의 시선으로도 아팠다. 1871년 노르웨이 의사 아우메우에르 한센이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따와 새롭게 불렸다. 피부나 호흡기를 통해 감염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균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감염되지 않는다. 지금은 대부분 생후 4주 전에 예방주사인 BCG주사를 접종한다. 과거 병에 걸린 환자들은 후유증으로 지체불구 등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록도 주민자치회 강선봉 감사는 “2020년께 완전 퇴치될 질환이라는 보고도 있다”고 말했다.

※2월23일자부터 격주로 연재 중인 ‘고흥군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마을’은 5월 한 달 동안 ‘소록도, 사람들’ 4회 연재로 대체합니다.

소록도(고흥)|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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