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군대 재원으로 백성 먹여 살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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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학술대회

군비(軍費)가 조선을 먹여 살렸다?

조선 군정(軍政)은 ‘삼정(三政)의 문란’ 등 수탈 측면에서 인식되는 게 보통이지만 조선 후기 군문(軍門·군대)이 국가 재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신진 역사학자들의 연구 발표가 나왔다. 군대의 재원이 기근 발생 시 백성의 구휼, 국가의 경상비 사업비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됐다는 것이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지난달 30일 연 연구발표회 ‘조선후기 중앙군문의 역할과 국가재정’에서 조낙영 서울대 박사는 강화도에 비축한 군량의 활용에 주목했다. 발표에 따르면 강화도는 정묘호란 뒤 왕실과 조정이 유사시 피신할 수 있는 보장처(保障處)로 주목받으면서 유수부로 승격됐고 인조의 명에 따라 군량 비축을 시작했다. 현종 대인 1666년에는 그 양이 15만 석에 이르렀다. 17세기 초 조선의 1년 국가예산이 약 10만 석이다.

강화 유수부의 군량은 인조 대부터 기근의 진휼곡(賑恤穀)으로 사용됐다. 경신(1670∼1671년·경술년과 신해년을 합쳐 부름) 대기근이 발생한 현종 대까지 주로 경기도에 풀린 강화도의 진휼곡이 쌀만 10만 석이 넘는다. 숙종 대는 18만 석 넘게 진휼곡으로 전용됐는데, 평안 황해 충청 제주도의 백성까지 구휼했다.

조 박사는 “18세기 들어 청의 재침략 위기감이 해소되고 (강화도 피신론보다) 서울 방어론이 힘을 얻으면서 강화도에 막대한 군량을 비축할 필요가 줄어들었던 것”이라며 “강화 유수부는 군사기구보다 재정기구로서 더 큰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유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이날 조선 후기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3군문의 하나였던 금위영의 역할에 관해 발표했다. 그는 “19세기 들어 금위영의 운영은 군사적 기능보다 호조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기능이 우선시됐다”고 평가했다. 연구에 따르면 금위영은 군역을 치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군사의 수를 줄여 생긴 재원을 호조로 보냈는데, 연평균 호조 재원의 5∼22%에 달했다.

발표회의 총론을 맡은 송기중 충남대 박사는 “조선 후기 군대 재원의 전용은 군역 부담 완화 정책과 함께 백성의 부담을 줄이는 민본 이념을 실현하면서 국가 재정의 공공성을 높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군비#한국역사연구회#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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