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빛나는 오늘이 있어 삶은 계속되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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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최성은 옮김/208쪽·1만3000원/문학과지성사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공산주의에 대한 내 믿음은/이미 흔들렸다/나는 내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생각하기 시작했다.’(미완성 원고에서)

‘충분하다’는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31∼2012)의 유고 시집이다. 그는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이후 지금껏 시인 수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한국어판 ‘충분하다’에는 고인이 생전에 출간한 마지막 시집 ‘여기’와 사후 출간된 ‘충분하다’ 전체가 묶였다. 언어의 장벽이 있어 서양 시 특유의 리듬감은 향유하기 쉽지 않지만, 쉼보르스카의 작품은 시어가 쉽고 단순하며 표현이 압축적이어서 시적 감각이 투명하게 전달되는 쪽이다.

‘내가 오로지 기억을 위해, 기억만 품고서 살기를 바란다./어둡고, 밀폐된 공간이라면 더욱 이상적이다./하지만 내 계획 속에는 여전히 오늘의 태양이, 이 순간의 구름들이, 현재의 길들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기억에 침잠될 때도 있지만 여전히 빛나는 현재로 인해 삶은 계속된다. 때로는 기억에 붙들려 있는 것이 힘겨울 때도 있지만 시인은 안다. 그 기억이 끝나는 순간이 생의 마지막이란 걸.

책을 읽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판도 있다. ‘우리는 훨씬 더 오래 산다,/하지만 덜 명확한 상태로/그리고 더 짧은 문장들 속에서.’(‘책을 읽지 않음’에서) 놀라울 만큼 생애는 길어졌지만 호흡 긴 독서를 하는 대신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짧은 문장들을 주고받는 시대. 시인은 언제 어디서든 빠르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만 그만큼 빨리 잊혀지는 세상에 대한 비탄을 노래한다.

그는 2009년 ‘여기’를 출간한 뒤 “다음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정했다”고 일찍이 밝혔다. 시인이 쓴 시편들의 아름다움은 생의 마지막임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힘이 넘친다. 시인이 남긴 미완성 원고에는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낄 무렵 만난 서방 시인의 작품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시인은 서방 시인에게 놀라움을 표현했지만 많은 독자들은 쉼보르스카의 작품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할 것 같다. ‘그것은 생각하는 인간이 쓴 시였다./아무런 구속도, 제한도 받지 않은’.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충분하다#비스와바 쉼보르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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