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아이러브 스테이지] 차지연의 포스, 뮤지컬 ‘레베카’의 다스베이더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1월 28일 05시 45분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부인 역을 맡아 특유의 어두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차지연. 차지연은 팬들에게 ‘차댄’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다른 배우들에게서 경험하지 못했던 차지연만의 댄버스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레베카에서 댄버스 부인 역을 맡아 특유의 어두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차지연. 차지연은 팬들에게 ‘차댄’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다른 배우들에게서 경험하지 못했던 차지연만의 댄버스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 뮤지컬 ‘레베카’ 댄버스 부인 차지연

송화·아이다·명성황후 등…변신의 귀재
‘레베카’에선 악역 캐릭터로 어둠의 포스
배신감에 토해내듯 부르는 노래 명넘버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 개인적으로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하는 배우가 있다. 이런 배우의 공통된 특징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역할과 연기와 노래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새로운 배역을 맡으면 과거에 맡았던 인물을 스윽 끌어다가 세워 놓는다. A라는 캐릭터에는 비슷한 느낌의 B를 끌어다 놓고, C에는 같은 이유로 D를 데려온다. 이런 일이 몇 차례고 반복되다 보면 슬슬 관객이 눈치 채기 시작한다. “이번에 ○○씨가 E를 맡았다고? 그렇다면 대충 안 봐도 F겠군.”

그런 점에서 차지연(34)이란 인물은 대극점에 서 있는 배우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에서는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송화(서편제)는 송화였고, 아이다(아이다)는 아이다였고, 명성황후(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황후였고, 마그리드(마리 앙투아네트)는 마그리드였다. 물론 지금 공연 중인 레베카에서 차지연은 댄버스 부인이다. 과거의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차지연만의 댄버스.

● ‘여자 다스베이더’의 어둠의 포스

새해가 되면서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소망 하나가 있었다. ‘포털 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에 오른 사람과 인터뷰하기’라는 것이었는데, 정말 1월에 덜컥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센(예를 들어 로또라든지) 소원을 빌어볼 걸. 차지연은 요즘 일요일 밤과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복을 누리고 있다. MBC ‘일밤-복면가왕’에서 최초로 5연승을 기록하고 있는 캣츠걸의 정체로 지목받고 있는 덕분이다.

뮤지컬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주인공 같은 배역이다. 맨덜리 저택의 죽은 전 안주인 레베카를 지극히도 사랑한 나머지 착하고 여린 새 안주인을 괴롭히는 악역 캐릭터다. 지금까지 옥주현, 신영숙, 리사 등 최고의 여배우들이 댄버스를 거쳤거나 현재도 맡고 있다. 차지연이 댄버스를 맡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올 게 왔구나” 싶었다. 고담시에 세워 놓으면 딱 어울릴 듯한 맨덜리 저택과 흡혈마녀를 연상케 하는 치렁치렁한 검은 옷을 입은 음산한 댄버스. 국내 뮤지컬 여배우 중 가장 강력한 어둠의 포스를 지녔다고 평가되어 온 차지연에게 댄버스는 숙련된 시침질을 거친 맞춤옷이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차지연과 다수의 작업을 했던 연출가 이지나 교수(중앙대)는 그를 두고 ‘여자 다스베이더’라고 불렀다던가.

● 2막의 ‘레베카’, 이 한 곡에 승부를 걸다

차지연은 “사실 이전에도 몇 번 댄버스 제안이 왔었다”고 했다. 하지만 배우와 작품도 운과 때가 있다. 단 하루 차이로 다른 작품 출연계약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불발되기도 했다. 차지연은 “지금 댄버스를 만난 게 너무 좋다. 아마도 그때였다면 지금과 같은 희열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맨 바닥부터 레고처럼 하나하나 쌓아가야 하는 창작 작업, 인생 최대의 전환기가 되어 준 결혼. 결국 돌고 돌아 만난 댄버스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인물이 아니었단다. 따라서 그저 어둠의 존재로만 표현할 수는 없었다. 노래(댄버스의 ‘레베카’는 이 작품 최고의 명넘버다)만 잘 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차지연은 “댄버스를 알아가는 과정은 마치 겹겹이 쌓인 페스추리 같았다”고 했다.

차지연이 기존 배우들의 댄버스와 다른 점은 2막에 혼자 2층에서 부르는 ‘레베카(리프라이즈·반복)’에 있다. 죽은 레베카가 자신에게조차 비밀을 숨겼던 사실을 알게 된 댄버스가 배신감에 떨며 절규하듯 부르는 노래다. 사실 극 중 그리 돋보이는 장면은 아니다. 다른 배우들이 할 때는 “굳이 넣어야할 필요가 있을까”싶기도 했다. 그런데 차지연은 “이 한 곡에 승부를 걸었다”고 했다. 레베카에 대한 배신감이 아닌 자신에 대한 배신감. 그녀의 가장 아프고 은밀한 부분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 그게 댄버스이고 이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차지연은 절규하지 않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댄버스를 ‘토해’낸다.

차지연과의 한 시간이 꿀떡꿀떡 지나갔다. 밤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입장하면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 수런수런해지고 있었다. 터벅터벅 예술의전당 계단을 내려가면서 새로운 소망을 빌었다. 이번엔 ‘복면가왕 10연승한 사람과 인터뷰하기’로 해볼까. 설마, 설마 또 만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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