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서울 광화문광장엔 추억이 깃들 자리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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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머무는 풍경: 드로잉으로 기록한 도시 이야기/정연석 지음/288쪽·1만5000원·재승출판
“광화문광장은 ‘관리’에 편한 구조”… 건축가인 저자, 드로잉과 함께
비판적 시각 담은 건축이야기 펴내

서울광장을 둘러싼 건물들. 지은이는 “시간의 흔적이 뒤섞여 얹어진 건물들이 광장을 위요(圍繞·둘러쌈)했다”고 썼다. 광장 잔디밭 아래 눌러 쌓인 ‘문화적 만행’에 대한 회고담과 함께. 재승출판 제공
서울광장을 둘러싼 건물들. 지은이는 “시간의 흔적이 뒤섞여 얹어진 건물들이 광장을 위요(圍繞·둘러쌈)했다”고 썼다. 광장 잔디밭 아래 눌러 쌓인 ‘문화적 만행’에 대한 회고담과 함께. 재승출판 제공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광화문과 북악의 중첩을 바라보며 배회하다가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정도다. 예측 불가능한 도시의 흐름에서 분리된 이 광장은 선별적이고 제한적인, 예측 가능한 행위만을 권하는 데 유리하다. ‘관리’에 편한 구조인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대해 쓴 이 부분을 읽다가, 6년 전 대학로에서 만난 영국 도시디자인 전문가 찰스 랜드리 씨(67)가 그곳을 보고 나서 한 말이 떠올랐다.

“‘광장’이 아니다.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기대 쉴 곳 없는, 달리는 자동차로 포위된 커다란 인도(人道)다.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이 북쪽 찻길을 보행로로 바꿔 내셔널갤러리와 연결된 계단을 만들고 휴식공간을 확보한 사례를 참고하길 권한다.”

아기자기한 그림과 아삭아삭한 글을 예쁘게 추려 담아 포장한 건축 스케치 에세이는 쌓이고 쌓였다. 44세 건축가인 저자가 내놓은 드로잉에 딱히 독특한 구석은 없다. 후루룩 책장을 쓸어 넘기던 손을 여러 번 멈추게 한 건 보기 좋은 모양새의 오브제에 집중하지 않은 그의 시선이다.

대구 신암동의 ‘황궁사우나’ 건물. 직사각형의 4층 콘크리트 건물 입구에 부산 범어사 일주문을 옮겨온 듯한 기와지붕과 기둥이 붙어 있다. 공간을 형성하는 요소 간 맥락은 안중 근처에도 두지 않은, 이 땅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무례하고 무성의한 키치(kitsch·저속함)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사거리의 아이파크타워는 미국 건축가 대니얼 리베스킨트 씨(69)가 설계해 2004년 완공됐다. 리베스킨트 씨는 “건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 밖에서 바라보는 행인으로 이뤄진 연극의 중심을 디자인했다”고 설명했지만 건축 관계자들은 대개 “리베스킨트 사무소의 말단 직원이 졸면서 그린 입면”이라고 수군거렸다. 저자는 이 건물 드로잉 아래에 “리베스킨트의 뛰어난 재능이 왜 하필 서울 삼성동에서 자취를 감췄는지 묻고 싶다”고 썼다. 속 시원하다.

서울광장에 대한 잊혀진 사연도 들춰냈다. 2003년 1월 설계공모에서 당선된 서현 한양대 교수의 ‘빛의 광장’ 계획안을 착공 나흘 전 돌연 폐기하고 잔디로 뒤덮어버렸던 기억. 저자는 “제대로 된 시민광장을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노력을 현상설계 당선작과 함께 내다버리고 목가적인 잔디밭을 만들었다”고 썼다. 부질없는 뒷공론일 뿐일까. 잘못을 덮어 가리지 않고 거듭 아프게 헤집어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위험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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