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식욕·성욕·창작욕에 굶주린 나, 미군포로가 된 그 나치소년병이 바로 나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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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껍질을 벗기며/귄터 그라스 지음/장희창 안창혁 옮김/576쪽·2만5000원·민음사
대작가 귄터 그라스의 솔직한 고백… ‘양파…’와 후속작 ‘암실이야기’ 출간

귄터 그라스는 2006년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출간하고 가진 한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목에 양파를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양파 껍질을 벗기면서, 즉 글을 쓰는 동안에, 껍질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좀 더 분명해지고 의미가 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라진 것들이 생생하게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지요.” ⓒ Gerhard Steidl 2009
귄터 그라스는 2006년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출간하고 가진 한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목에 양파를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양파 껍질을 벗기면서, 즉 글을 쓰는 동안에, 껍질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좀 더 분명해지고 의미가 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라진 것들이 생생하게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지요.” ⓒ Gerhard Steidl 2009
“내게 내려진 바로 다음 행군 명령서는 내 이름을 한 신병이 나치 무장 친위대의 어느 훈련장에서 전차병 훈련을 받게 되었음을 명백히 말해 주었다.”

저 문장 하나가 두꺼운 자서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1927∼2015)는 2006년 자서전 출간 직전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7세 때 나치 무장 친위대에서 복무한 사실을 고백했다. 나치의 책임을 묻는 작품 ‘양철북’으로 세계적 인정을 받은 그가 자신의 과오를 오랜 기간 감춘 사실이 드러났다.

국내에선 지난달 13일 그라스가 세상을 떠나고 뒤늦게 출간됐다. 오히려 다행이다. 친위대 복무 논란과 상관없이 차분히 읽게 됐으니. 자서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첫 소설 ‘양철북’ 초판본이 나온 1959년까지 그의 20, 30대의 삶을 다룬다. 그는 ‘믿음 깊은 소년 나치’였고 무장 친위대를 엘리트 부대로 여기고 동경했던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기록에 남지 않은 과오를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그를 작가로 만든 굶주림이다. 그에겐 세 가지 굶주림이 있었다.

첫째는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배고픔이다. 그는 굶은 적 없이 자랐지만 수용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을 갉아먹는 굶주림에 시달렸다. 둘째는 성욕이다. 그는 자신의 페니스에 대해 꽤 상세히 서술하며 주변 여자들에게 지독한 욕정을 품고 돈이 아닌 입으로 매음하던, 마치 발정이 나 헐떡이는 개처럼 굴었던 자신을 고백한다. 첫 굶주림은 상상으로 요리를 하거나 얼어붙은 감자를 먹으면서 몇 시간을 견뎠고, 둘째 굶주림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조절했다. 낯 뜨거울 정도로 가감 없는 그의 솔직함이 인간 본질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세 번째 굶주림은 제어할 수도, 제어해 본 적도 없었다. 바로 예술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종이란 종이는 모조리 더럽힐 정도의 중독성을 통해서도 허기를 해소할 수 없었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포식해 봐도 그 굶주림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만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난 언제나 좀 더, 좀 더 하며 허기를 느꼈다.”

그는 조각을 공부하다가 글로 눈을 돌린다. 시로 등단한 그는 몇 편의 시를 방송국 심야프로그램에 팔고 받은 원고료로 타자기에 쓸 종이를 샀다. ‘양철북’을 쓸 당시의 그의 회상엔 희열이 느껴진다. “한 장 한 장. 단어들과 이미지들이 재촉했고, 번갈아가며 상대의 뒤꿈치를 밟았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냄새 맡고, 맛보고, 관찰하고, 이름 붙여지기를 원했다.”

자서전엔 문인 그라스에 관한 여러 사연이 기록돼 있다. 그는 어머니 대신에 가게 외상값을 받기 위해 여러 집을 다니면서 키운 관찰력으로 사실적인 산문 쓰기 능력을 길렀고 담배를 사면 받을 수 있는, 예술 작품이 인쇄된 쿠폰을 모아 예술 공부를 했다. 강박에 가까운 글쓰기를 위해 담배를 물게 됐다.

‘양파 껍질을 벗기며’의 후속편 격인 2008년 출간한 자전소설 ‘암실 이야기’도 함께 출간됐다. 글쓰기에 몰두하느라 4명의 여성에게서 얻은 8명의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미안함을 ‘또’ 글쓰기로 풀어냈다.

성욕과 식욕, 두 욕구에 멈춰 있었다면 그는 작가가 되지 못했을 거다. 보통 사람은 왜 창작 욕구가 성욕이나 식욕처럼 본능이 될 수 없는지 좌절하다가도, 예술가의 어두운 면을 마주하니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않을 그 허기가 간단치 않음이 느껴져 다행이다 싶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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