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고문 끝 숨진 노인과 어린이, 책임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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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인가 정철인가/오항녕 지음/286쪽·1만7000원·너머북스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알려진 정여립 모반 사건 때 일이다. 모반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이발의 팔순 노모와 어린 아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숨을 거뒀다. 노인과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에 비난 여론이 들끓자 늘 그랬듯 국왕 대신 오명을 뒤집어쓸 사람이 누구인지를 놓고 책임론이 불거졌다.

이 책은 당시 심문을 한 추국청의 책임자, 즉 위관(委官)이 서애 유성룡인가, 송강 정철인가에 대한 긴 논쟁에서 비롯됐다. 조선왕조실록에 이 기록이 누락되면서 빚어진 논쟁이다. 책임론의 당사자인 송강과 서애는 16세기 조선시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들이다. 송강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긴 문호이고, 서애는 임진왜란 때 난국을 수습한 인물이다. 하지만 송강은 서인, 서애는 동인으로 정치적으로 대립적 관계에 있었다.

저자는 누가 위관이었느냐는 사실 추적에만 그치지 않고, 당파 싸움의 시각으로 이 사건과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있다. 당쟁을 식민사관의 하나로 공박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사회의 제도와 우연한 일로 빚어지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돌려야 하느냐는 철학적 문제와 맥이 닿아 있다.

예컨대 왕의 지휘 아래 위관-당상-낭청으로 이어지는 추국청의 구조에서 위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조정의 중신으로 몸을 담았던 송강과 서애 모두 이런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당쟁론은 정치사를 인간의 의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다. 객관적 조건과 안타까운 우연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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