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 지낸 송시열은 왜 관복입은 인물화가 없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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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가장 많지만 한결같이 ‘선비복’ 입은 모습
관복없이 늘 빌려입어… “儒服이 적합” 본인 뜻 반영

18세기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김창업(1658∼1721)이 그린 우암 송시열초상. 92.5×62cm. 안동 권씨 화천군파 소장.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18세기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인 김창업(1658∼1721)이 그린 우암 송시열초상. 92.5×62cm. 안동 권씨 화천군파 소장.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조선 후기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은 노론의 영수로 주자학의 대가라는 상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우암이 조선시대 사대부 가운데 초상화로 가장 많이 그려진 인물이라는 점이 새롭게 밝혀졌다.

최근 국립춘천박물관이 펴낸 전시 도록 ‘초상화로 보는 강원의 인물’에 실린 이혜경 학예연구사의 논문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 목적’은 전해져 내려온 우암의 초상화만 30점이 넘는다고 밝혔다. 경기 화성의 매곡서원부터 전북 정읍의 고암서원, 충북 충주의 누암서원, 경남 거제의 반곡서원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의 사원과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에 봉안됐다. 조선 유학자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것이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압도적 다수다.

우암의 초상화가 이토록 많이 제작된 건 당시 주류 성리학자의 절대적 신봉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자(朱子) 제일주의자’였던 우암은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여 번이나 등장하며, 사약을 받고 숨졌음에도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게다가 유배와 복권을 반복한 극적인 생애와 출사보단 사림을 지킨 자세가 더해지며 후대로 갈수록 신화적 추종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우암의 초상화는 하나같이 관복이 아닌 유복(儒服)을 입은 모습으로만 그려졌다. 주로 복건(幅巾)에 심의(深衣·선비의 겉옷)를 걸친 모습이다. 관직 생활이 짧긴 했어도 좌의정까지 지냈던 걸 감안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는 우암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우암의 시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에 기록된 제자 권상하(1641∼1721)와의 대화를 보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암은 “간혹 조정에 나가긴 했으나 그때마다 다른 이의 공복(公服)을 빌려 입었다”며 “스스로 공복을 지은 일이 없으니 심의가 가장 적당하다”고 말했다. 스스로 유학자의 복장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후대 사대부의 초상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제자나 그를 따랐던 문인인 권상하와 정호(1648∼1736), 권섭(1671∼1759)도 유복 차림의 초상화만 만들었다. 이혜경 학예사는 “유복 차림 초상화는 20세기 초 유학자들에게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하나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우암 송시열#초상#관복#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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