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평화는 군비경쟁 불러… 亞太상황도 낯설지않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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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의 ‘회복된 세계’ 국내 첫 번역 박용민 駐유엔대표부 참사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저서 ‘회복된 세계’를 번역한 박용민 주유엔대표부 참사관. 그는 “이 책이 다루는 정통성의 문제는 21세기 아시아에도 대입할 수 있는, 시대를 관통하는 힘을 지닌 키워드”라고 말했다.박용민 참사관 제공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저서 ‘회복된 세계’를 번역한 박용민 주유엔대표부 참사관. 그는 “이 책이 다루는 정통성의 문제는 21세기 아시아에도 대입할 수 있는, 시대를 관통하는 힘을 지닌 키워드”라고 말했다.박용민 참사관 제공
“국제정치나 외교사 전공자에겐 고전이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읽기가 쉽지 않아 곰곰이 생각하며 씹어 먹듯 읽어야 하는 책이거든요. 국내에 읽은 사람은 얼마 없는데 읽은 것처럼 구는 사람이 많은 책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50년 넘게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것 아닐까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대표 저서인 ‘회복된 세계’(북앤피플·사진)가 뒤늦게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한국어 초역은 박용민 주유엔대표부 참사관(48)이 맡았다. 현재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는 박 참사관은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이 책이 여태껏 한국어로 나오지 않은 이유로 방대한 내용과 난해함을 꼽았다.

키신저 전 장관이 하버드대 교수 시절(1957년) 펴낸 이 책은 나폴레옹 전쟁부터 빈 체제 형성까지 1812∼1822년 간의 유럽 외교사를 ‘정통성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분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지탱해 온 정통성인 국제 금융 체제의 위기나 핵 비확산 체제가 도전받는 상황을 보세요. 1950년대에 쓰인 책의 교훈이지만 ‘정통성의 회복’은 오늘날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지요.”

유엔대표부에서 중동지역 정세 분석과 평화유지활동(PKO) 업무 등을 맡고 있는 박 참사관이 이 책의 번역을 시작한 것은 주인도네시아 대사관 근무 시절인 2006년.

업무와 병행하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다 보니 한국어판 기준으로 660여 쪽을 번역하는 데 무려 7년이 걸렸다.

“거북이걸음으로 번역했죠.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높은 산은 하산이 더 어렵다’더니 특히 후반부 작업에 애를 먹었습니다.”

이 책은 대부분 빈 체제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빈 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유럽에 100년간의 평화를 가져다줬다. 마침 올해는 1차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는 해.

“긴 평화는 유럽 각국이 전쟁의 고통을 잊게 만들었고 이는 군비 경쟁을 불러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죠. 아태지역의 최근 상황도 낯설지 않아요. 비관론을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국제 질서가 전후 시대보다 전전 시대를 닮아가고 있다는 지적은 부분적으로 맞다고 봅니다.”

키신저 전 장관과의 인연도 소개했다. “김숙 전 주유엔본부 대사님과 키신저 박사의 면담에 배석한 적이 있어요. 대사님이 ‘이 청년이 박사님 책을 번역 중이다’고 했더니 ‘어렵지는 않냐. 좋은 번역 부탁한다’고 하시더군요. 한국어판 서문도 써 주셨지요. 연세가 아흔을 넘겼지만 정신은 갓 벼린 칼날같이 예리한 분이셨어요.”

박 참사관은 이 책에 앞서 ‘사랑은 영화다’ 등 영화와 여행에 관한 네 권의 에세이집을 낸 저자이기도 하다. 그림 솜씨도 남달라 에세이집에 쓰인 삽화도 직접 그렸다. 지금은 어떤 책을 준비 중인지 물었다. “개인 시간 대부분을 쏟아 부어야 했던 이번 번역 작업에 혼쭐이 나서 당분간 번역은 엄두가 나지 않네요. 제게 글재주가 있다면 이제 외교 교섭 문서와 보고서에 쏟아 부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헨리 키신저#박용민#회복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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