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팔순, 눈은 맑아지고 귀는 순해졌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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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신경림 지음/120쪽·8000원·창비
신경림 시인 11번째 시집 펴내

‘낙타’(2008년) 이후 6년 만에 새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펴낸 신경림 시인. 동아일보DB
‘낙타’(2008년) 이후 6년 만에 새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펴낸 신경림 시인. 동아일보DB
시인은 걷는다. 저 먼 옛 시절의 신작로를, 어머니가 오가던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를, 과거의 시간을. 시인은 지금도 가난한 시절에 머물고 있다. 40년 전 떠났지만, 실은 떠나지 못한 산비탈 달동네 단칸 흙벽돌집을 더듬어본다.

올해 팔순을 맞은 신경림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에는 시인이 꾼 꿈들이 적혀 있다. 삶의 거친 길, 벼랑 끝을 굽이굽이 지나온 시인의 눈은 맑아지고 귀는 순해졌다. 허세나 과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별’)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다시 느티나무가’)

짧지 않은 세월이 남긴 애잔한 인생은 서글픈 행복으로 기억된다. 신경림은 서른에 결혼했다. 충남 유성 큰 당숙네 옆집에 살던 아가씨(이강림)와. 당시 시인은 영어 과외로 생계를 꾸리며 시를 썼다. 신혼부부는 홍은동 산자락에 가난한 살림을 부렸다. 시인 김관식이 살던 집을 내어준 덕분이었다. 신접 살림집에 쳐들어오는 시인의 친구들에게 불평 없이 술상을 차려내던 아내는 결혼 8년 만에 위암으로 생을 마쳤다.

‘전기도 없이 흐린 촛불 밑에서/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시인의 할머니는 치매였고, 아버지는 중풍으로 고생했다. 산동네에 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망령 난 구십 노모를 미워하면서,/가난한 아들한테서 나오는 몇푼 용돈을 미워하면서,/ …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를 미워하면서,/산동네를 환하게 비출 달빛을 미워하면서,’(‘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시인의 마음속에 지금도 살고 있다. 시인 자신은 현재 서울 정릉 아파트에 살고 있다.

자신의 삶을 되짚는 시인의 내면 탐구는 버림받고 외로운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손길로 뻗어나간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과 시인은 하나가 된다.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나의 예수’)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더불어 숨 쉬고 사는 모든 것을 위하여/내 터를 아름답게 만들겠다 죽어간 것을 위하여’(‘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흑백 사진처럼 시에 붙들린 생의 장면 장면은 소박하고 따스한 꿈이다. 그것이 슬픈 꿈이더라도. 시인은 말한다. “꿈은 내게 큰 축복이다. 시도 내게 이와 같은 것일까.”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사진관집 이층#신경림#시집#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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