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세계 이해의 출발점 헌법, 30여쪽 번역에 1년반 걸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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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아랍어 원문으로 사우디 ‘헌법’ 번역한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조용한 여느 연구소들과 달리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에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중동 국가 헌법 번역에 참여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정상률 HK연구교수, 김종도 부소장, 김효정 HK연구교수, 이종화 소장, 안정국 교수, 박현도 책임연구원.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조용한 여느 연구소들과 달리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에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중동 국가 헌법 번역에 참여하고 있는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정상률 HK연구교수, 김종도 부소장, 김효정 HK연구교수, 이종화 소장, 안정국 교수, 박현도 책임연구원.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아랍어 단어 아므르말리키를 ‘왕령’으로 번역해야 할까, ‘칙령’이라고 옮겨야 할까.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의 학자 4명은 지난해 이 문제로 일주일을 씨름했다. 한국어로는 왕령과 칙령이 같은 뜻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왕이 혼자 결정해 내리는 명령과 각료회의의 동의를 얻은 뒤 내리는 명령에 차이가 있다. 결국 사우디 법 체제에 대한 글들을 읽고 미묘한 차이를 비교한 뒤에야 아므르말리키를 왕령, 마루숨말리키를 칙령으로 번역했다.

이 연구소는 사우디의 현대적 헌법이라 할 수 있는 통치기본법의 아랍어 원문을 번역해 중동국가헌법번역HK총서 1권 ‘사우디아라비아 통치기본법’(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을 최근 펴냈다. 중동 국가의 헌법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처음이다. 총서 작업에는 교수와 연구원, 조교를 포함한 20여 명이 3년째 참여하고 있다.

이곳은 2010년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HK) 해외지역연구 분야’ 연구소로 선정돼 10년 일정으로 중동 25개국의 헌법을 번역하고 있다. 2권 아랍에미리트 헌법 번역을 마친 데 이어 현재 3권 쿠웨이트 헌법을 번역하고 있다.

12일 서울 명지대 내 연구소에서 만난 김종도 부소장은 “해외 지역연구의 기본은 국가의 근본인 헌법인데, 중동의 헌법이나 법체계 연구는 국내에 전무한 실정”이라며 “늦었지만 중동 연구의 기초를 튼실하게 하기 위해 헌법 원문을 번역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학자들이 참조하던 영문판은 오류와 생략이 많고 문맥도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과 중동 사이에 자원, 건설 등 경제 교류에 이어 최근 문화 교류가 늘면서 중동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이번 연구의 계기가 됐다. 이종화 소장(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은 “아랍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질수록 아랍인의 행동을 지배하는 종교와 문화, 정신세계를 깊이 알아야 하며 그 출발점이 헌법”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소에 따르면 국내에 아랍어를 번역할 수 있는 학자는 50여 명에 불과하다. 번역 사업 초기에는 국내 아랍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사우디에 헌법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논쟁할 정도로 정보가 부족했다. 1992년 제정된 사우디 통치기본법 1조에는 “헌법은 지고하신 알라의 경전(꾸란)과 그분 사도의 순나(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언행록)”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란과 순나에는 국가 체제 및 작동 원리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통치기본법이 사실상 헌법 기능을 한다.

이번 사우디 통치기본법 번역에는 김 부소장을 비롯해 정상률 HK연구교수, 박현도 책임연구원, 안정국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가 참여했다. 총 9장 83조로 구성돼 30여 쪽에 불과한 분량을 번역하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가장 적확한 번역어를 찾아내기 위해 일주일에 세 차례 모여 회의를 하고, 사우디를 두 차례 방문해 현지 법대 교수들을 만나는 등 신중을 기했다. 사우디는 정교일치 군주제 국가여서 통치기본법은 우리 헌법과는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6조는 ‘국민들은…국왕에게 충성하고, 편할 때나 어려울 때나 행복할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복종하고 순종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는 소속 학자 6명과 명지대 아랍지역학과 교수 4명이 아랍의 언어, 정치, 종교, 가족법, 성(性) 등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소는 국내 최초로 지난달 이란 학자들과 아흐마드 마수미파르 주한 이란대사를 초청해 한국과 이란의 경제·문화협력을 주제로 ‘한-이란 포럼’을 열었다. 이 소장은 “이란 핵 이슈에 따라 국가 간 교류가 얼어붙기도 하지만 민간 학자들은 학술 교류를 꾸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아랍어#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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