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배트맨, 왜 쫄쫄이 입니?” 철학자가 묻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6일 03시 00분


코멘트

◇배트맨과 철학/마크 화이트, 로버트 아프 엮음·남지민 신희승 이해림 차유진 옮김
360쪽·1만7000원/그린비

책엔 없으니 신문에라도 실을 수밖에.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 히스 레저. 동아일보DB
책엔 없으니 신문에라도 실을 수밖에.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 히스 레저. 동아일보DB
‘히스 레저(1979∼2008)를 기억하며.’

아아, 다 필요 없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등장하는 헌사. 이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차고 넘친다. 21세기 제임스 딘 반열에 오른 레저에게 바친다는데, 그럼 됐다. 서평 끝.

안타깝다. 이러쿵저러쿵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진심으로 말씀드리니, 이 소개 글은 더 읽을 필요 없다. 배트맨을 좋아한다면 조커가 그립다면, 여기서 멈추고 책을 보시라. 하긴 배트맨은 개뿔, 슈퍼맨도 지겹다 하는 분도 있겠다. 그럼 이 책, 눈길도 주지 마시라.

이미 눈치 챘겠지만, ‘배트맨과 철학’은 전공서적이다. 배트맨대학 덕후(일본어 오타쿠·은둔형 외톨이에서 유래된 말)학과 학부생쯤은 돼야 읽는 맛이 제대로다. 영화 한두 편 봤거나 옛 TV 만화의 아련한 추억 정도론 접근이 상당히 난해하다. 물론 누구라도 책을 씹어 먹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번역을 고교생들이 했다. 우리도 한글은 읽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물론이고 국내에 들어온 배트맨 그래픽노블 정도는 다 독파해야 고개가 끄덕여지는 사례가 가득하다. 삼킬 순 있으나 목구멍에 자주 걸릴 것이라는 얘기다.

한마디로 ‘배트맨과 철학’은 평소 배트맨 애독(청)자들이 가졌던 철학적 혼란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 주는 책이다. 배트맨은 왜 그렇게 당하고도 끝끝내 악당들을 살려둘까(영화에선 잘 죽인다). 갑부인 브루스 웨인이 뭐가 아쉬워서 불법 자경단이 되어 밤거리를 배회할까. 허구한 날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결국엔 다시 쫄쫄이를 입는 이유가 뭘까. 친절하게도 미국에서 나름 일가를 이룬 철학 종교학 윤리학(심지어 물리학까지) 교수와 박사들이 이런 궁금증을 학문적으로 접근한다.

배트맨은 어릴 적 상처를 박쥐에 투영시켜 존재 방식을 찾는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더라도. 동아일보DB
배트맨은 어릴 적 상처를 박쥐에 투영시켜 존재 방식을 찾는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더라도. 동아일보DB
잠깐 고급스러운 척하자. 배트맨은 명백히 대중문화 상품이지만, 중층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는 심도 깊은 텍스트다. 실례, 뱉고 나니 감당이 안 된다. 그냥 얜 좀 다르다. 거미에 물린 적도 없고, 친부모가 하늘을 나는 외계인도 아니다. 엄청난 재산과 뼈를 깎는 육체적 단련을 빼면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다.

‘똘끼’는 충만하다. 어린 시절 눈앞에서 부모가 목숨을 잃은 뒤 눈이 뒤집혔다. 초등학생쯤 되는 애가 복수도 아니고, 평생 악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러곤 영웅도 범죄자도 아닌 ‘다크 나이트(Dark Knight·어둠의 기사)’로 산다. 분명 나쁜 놈 같진 않은데, 애들한테 “본받으라”고 권하긴 머뭇거려진다. 만화나 영화가 나올 때마다 끊임없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도 이런 모호한 경계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배트맨과 철학’이 명쾌한 해답을 주리라 기대하진 말자. 알잖은가. 철학이 언제 우리 등을 시원하게 긁어준 적이 있던가. 그래도 이 책은 좋은 의미에서 꽤나 편향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어질어질한 철학이 수북하지만, 결론은 배트맨이 몇 가지 결점은 있을지언정 옹호 가능한 캐릭터라고 쓰윽 손을 들어준다. 안쓰럽긴 해도 악플 달릴 정도는 아니란 거다. 하긴, 배트맨도 슈퍼맨처럼 ‘우리의 친구’ 아닌가.

다만 이 책은 사공이 너무 많다. 저자가 너무 많다 보니 꼭지마다 문장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가벼웠다 무거웠다 쉬웠다 어려웠다 하는데 전혀 리드미컬하지 않다. 이는 결코 고등학생 4명이 번역을 나눠 맡았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원문은 보지 않았지만, 웬만한 번역가보다 훨씬 애쓴 티가 난다. 감수자 말대로 ‘미덕적’ 같은 부자연스러운 대목도 있지만, 왜 그걸 살렸는지도 수긍이 간다. 하나 더, 돈 좀 들더라도 영화 스틸 컷이나 관련 만화를 군데군데 넣어 줬더라면. 그리 정색 안 해도 철학책인 줄 다 아는데. 냉소 어린 히스 레저 얼굴이 보고팠건만. 어찌 그리 야박하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히스 레저#배트맨과 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