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꽃과의 대화]청와대 뜰서 상추 키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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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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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본관 앞뜰의 모습. 청와대에서 기르는 꽃사슴이 보인다. 동아일보DB
청와대 본관 앞뜰의 모습. 청와대에서 기르는 꽃사슴이 보인다. 동아일보DB
2009년 어느 봄날로 기억된다. 미국 백악관 서쪽 잔디밭 일부가 채소밭으로 바뀌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가 나왔다. 그것을 제안한 사람은 갓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 물론 이전에도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 엘리너 여사가 만든 ‘빅토리 가든’(제2차 세계대전 때 전국적인 식량 확보 캠페인을 위해 만든 텃밭)이나 힐러리 클린턴 여사의 자그마한 옥상 텃밭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활동적인 미셸 여사의 텃밭은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참신한 뉴스로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텃밭 프로젝트에는 두 딸과 주변 초등학교 학생, 그리고 백악관 요리사들이 함께 참여했다. 미셸 여사는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체험을 통해 미국 전체에 ‘개별 가정 스스로가 신선하고 영양이 풍부한 채소를 재배해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전달하고자 했다. 특히 어린이 비만과 당뇨, 건강한 식습관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미국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영향을 줄 것이라 믿었다. 물론 55가지나 되는 다양하고 신선한 채소와 허브, 과일을 대통령 가족과 귀빈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미셸 오바마가 올해 5월 텃밭 가꾸기에 대한 책(American Grown: The Story of the White House Kitchen Garden and Gardens Across America)을 펴내 화제가 됐다. 아쉽게도 대통령이 텃밭 일에 참여했다는 얘기가 없는 것을 보면 역시 미국 대통령이 바쁘긴 바쁜가 보다. 아니면 “잡초를 뽑자”는 부인의 제안을 거역할 정도로 간 큰 남자이던가.

성격이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고려나 조선시대에 왕이 직접 친경(親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종시대부터 무려 291건의 친경 관련 기록이 있다.
승정원일기에도 66건이나 관련 기록이 나온다. 농업 국가인 조선에서 왕의 친경은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先農祭)와 함께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정조처럼 실용적인 왕에게는 형식에 치우친 친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도 하다. 일성록에는 “그만두라”(정조 3년 1월 1일)거나 “동적전(東籍田)을 직접 경작(親耕)하는 것이 본래 법의 뜻이지만, 근래에는 사치스럽고 거창한 일이 되어 소모되는 비용이 적지 않아 자못 형식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정조 5년 1월 1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후대인 순조 때 궁궐을 그린 동궐도에는 왕의 친경 공간으로 보이는 곳이 창덕궁 후원에 등장한다. 고종 때에도 조선 8도의 모양을 따라 만든 논(팔도배미)과 그 부속건물인 경농재(慶農齋)가 오늘날의 청와대 인근인 경복궁 뒤뜰에 있었다.

현재 우리가 아는 청와대 정원은 매우 단정한 모습이다. 그런데 식물을 전공으로 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잘 다듬은 넓은 잔디 사이사이 소나무, 주목, 회양목, 향나무, 왜진달래, 벚꽃, 단풍나무로 가득한 청와대의 정원은 왠지 말쑥함 이외의 느낌은 주지 않는 듯하다. 그런 점에선 국회의사당도 마찬가지다. 특히 그 많고 많은, 기념으로 심은 나무들은 왜 온통 상록침엽수뿐일까? 언제나 푸르름을 간직하고 국정에 임하자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영원한 권위나 권력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역으로 주변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이 변화할 수도 있다. 만약 청와대에 ‘좀 더 실용적인 식물’이 많아진다면 우리네 삶에 와 닿는 살갑고 푸근한 정책이 늘어나지는 않을까.

새 대통령을 뽑는 19일엔 다정하고 푸근한 대통령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려고 한다. 따스한 봄날을 맞아 청와대 앞뜰에 팬지를 심으며 새 정부의 밝은 미래를 구상하는 대통령, 뒤뜰에 상추 같은 잎채소와 토마토를 가꾸면서 로컬푸드의 중요성과 어린이들의 식생활 개선을 고민하는 대통령, 식목일엔 권위적인 상록침엽수가 아니라 살구나무같이 정겨운 낙엽활엽수를 심는 그런 대통령 말이다. 꽃이나 식물을 키우며 희망을 전달하는 대통령, 정말 멋지지 않겠는가?

서정남 농학박사(농림수산식품부 국립종자원) suhjn@korea.kr
#O2#청와대#상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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