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캡슐 같은 녹슨 원통,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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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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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만에 돌아온 육근병… 일민미술관서 ‘비디오크라시’전

서울 일민미술관 바깥에 설치된 육근병 씨의 ‘Survival is history’는 1995년 리옹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작품으로 국내에선 처음 소개됐다. 1992년 카셀 도쿠멘타에 참여해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작가의 궤적과 앞으로 펼칠 프로젝트를 선보인 전시가 일민미술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다. 일민미술관 제공
서울 일민미술관 바깥에 설치된 육근병 씨의 ‘Survival is history’는 1995년 리옹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작품으로 국내에선 처음 소개됐다. 1992년 카셀 도쿠멘타에 참여해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작가의 궤적과 앞으로 펼칠 프로젝트를 선보인 전시가 일민미술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다. 일민미술관 제공
1992년 카셀 도쿠멘타의 주전시장 앞에 높이 620cm의 흙 봉분과 철제 기둥이 세워졌다. 동서양을 상징한 두 구조물에 담긴 TV 모니터에선 깜박이는 눈이 담긴 영상이 마주 보고 있었다. 보는 눈과 보이는 눈이 교차하면서 삶과 죽음,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관조하게 만든 한국 작가의 독특한 설치작품에 호평이 쏟아졌다. 성공 다음에 오는 성장통을 겪은 것일까. 작가는 세계의 주요 미술관과 비엔날레 등에서 간간이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국내 활동은 뜸해져서 한때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지속적으로 ‘눈’에 관한 작업을 펼쳐 온 육근병 씨.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지속적으로 ‘눈’에 관한 작업을 펼쳐 온 육근병 씨.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육근병(55)이 돌아왔다. 백남준에 이어 세계 미술가들의 꿈의 무대인 ‘카셀’에 진출했던 그가 1998년 개인전 이후 처음으로 국내 미술관에서 격을 갖춘 개인전을 마련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이 기획한 ‘비디오크라시(Videocracy)’전이다. 4개의 오디오 비주얼 신작과, 그를 대표해온 ‘눈’ 작업 관련 자료를 선보인 전시는 튼실하고 묵직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회고전이 아닌, 비디오로 유희한 작품을 모은 회상전”이라며 침묵의 시간에 대해 답했다. “카셀 이후 ‘센 곳’에서 많이 놀다보니까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진정성이 사라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잠시 조용히 작가로서의 자세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전시에는 오랫동안 숨을 고른 뒤 다시 세계와의 소통을 꿈꾸는 작가의 내공과 열정이 생생하게 녹아있다. 김태령 관장은 “육근병 이후 20년 만에 올해 카셀에 한국 작가들이 참여했다. 전시는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미술이 세계와 교류하고 확장해온 여정을 돌아본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2월 9일까지. 1000∼2000원. 02-2020-2050

○ 과거에서 미래를 보다

어린 시절 그는 담벼락 구멍 사이로 집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작은 틈으로 보면 마루 밑 강아지도 공룡처럼, 배추도 신비한 식물처럼 보였다. 그때 추억이 훗날 그가 전개한 ‘눈’(eye) 작업의 모티브가 됐다. 미술관 밖에 드러누운 녹슨 원통도 그중 하나다. 1995년 리옹 비엔날레에 선보였던 작품(‘Survival is history’)인데 눈과 1945∼95년 일어난 전쟁과 재난 등 지구촌의 희로애락을 원형 스크린에 담았다. 과거에서 미래를 살펴보는 작품은 역사란 생존의 투쟁 과정임을 일깨운다. 3층에선 그가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내년 뉴욕의 유엔본부에 설치할 ‘눈’ 프로젝트의 준비과정을 발표한다. 190여 개국 어린이의 눈을 건물 외벽에 투사하는 작업이다.

학맥 중심의 미술계에서 경희대 출신 무명 작가였던 그는 198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처음 주목받는다. 당시 그는 미국 조각가 마틴 퓨리어와 대상 후보를 겨룰 만큼 호평을 받아 카셀에 초청받았다. 도쿠멘타 총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그는 “(나를 알아본) 당신 참 훌륭하다”고 말했다. 그런 자신감과 배짱이 카셀의 스타를 만든 것이다.

○ 들꽃에서 나를 보다

‘불’을 소재로 한 동영상을 담은 ‘메신저의 메시지’. 일민미술관 제공
‘불’을 소재로 한 동영상을 담은 ‘메신저의 메시지’. 일민미술관 제공
시대를 읽는 눈을 벗어나 관조적 분위기의 신작도 선보였다. 작품 운송용 나무상자에 영상을 접목한 ‘트랜스포트’는 아홉 살부터 열 살 차의 평범한 남녀 12명을 담은 영상과 양평 작업실 부근에서 마주친 들꽃과 풀 등 자연 속 12개 이미지를 대비시켰다.

“이번 전시에는 중심이 아닌 언저리에 있는 요소들, 그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담았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사람이 아니라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름 없는 꽃은 곧 나의 자화상이다.”

물과 사람들이 짝을 이루는 2채널영상(‘Apocalypse’)도 인상적이다. 늘 아래로 흐르는 물과 달리,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은 뒤로 걷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바람에 휘날리는 흰 무명천을 담아낸 영상(‘Nothing’)은 움직이는 회화처럼 아름답다. ‘이미지의 가장 큰 상대는 진실’이란 믿음을 바탕으로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독백 같은 작업이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육근병#일민미술관#비디오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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