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미토스에 대한 로고스의 불신과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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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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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 ★★★
폴란드 연극 ‘오디세이’ ★★★

고대 그리스어(헬라어)에서 나온 미토스(신화)와 로고스(이성)는 모두 ‘말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다. 미토스가 신이나 왕족, 영웅이 말할 때 쓰인 동사 미테오마이(mytheomai)에서 나온 반면 로고스는 여자나 노예, 모략가가 말할 때 쓰인 동사 레게인(legein)에서 파생했다. 이에 따르면 미토스는 고결한 이야기이고 로고스는 비루한 이야기가 된다.

미국의 종교철학자 브루스 링컨은 이런 미토스와 로고스의 위계질서를 뒤엎은 사람이 철학자 플라톤이었다고 말한다. 예술을 이데아의 복제품으로 평가절하한 플라톤이 시인의 언어로서 미토스를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몰아붙이고 로고스를 철학자들의 ‘참된 이야기’로 새롭게 포장하면서 ‘미토스=신화=허무맹랑한 것’과 ‘로고스=이성=진실한 것’의 공식이 확립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극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는 처용설화의 이면에 체념과 용서를 강요당한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며 이를 광기와 망상의
 분출로 풀어낸다. 처용의 아들이자 그 복수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오가리(이남희·오른쪽)와 그 망상의 산물이자 분신인 
남두자(유연수). 국립극단 제공
연극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는 처용설화의 이면에 체념과 용서를 강요당한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며 이를 광기와 망상의 분출로 풀어낸다. 처용의 아들이자 그 복수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오가리(이남희·오른쪽)와 그 망상의 산물이자 분신인 남두자(유연수). 국립극단 제공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플라톤이 제창한 로고스중심주의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플라톤이 설정한 ‘신화의 언어로서의 미토스와 이성의 언어로서의 로고스’의 이분법적 주술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주말 동서양의 신화를 새로운 무대언어로 꾸민 두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 세 번째 작품인 ‘나의처용은밤이면양들을사러마켓에간다’(최치언 작·이성열 연출)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으로 13∼15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폴란드 연극 ‘오디세이’(크시슈토프 가르바체프스키 연출)다. 전자가 아내와 역신이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초연하게 대처했던 처용의 설화를 현대적으로 풀어냈다면 후자는 20년 만에 귀국한 트로이전쟁의 신화적 영웅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원작의 미토스에 대한 불신과 왜곡(데포르마시옹)이다. ‘나의처용…’은 처용설화의 ‘용서하라’를 ‘용서하지 마라’로 뒤집는다. 연극의 주인공 오가리(이남희)는 마약에 취한 상태로 심야총알택시를 운전하는 밑바닥인생이다. 그의 분신처럼 등장하는 남두자(유연수)와 하구니(김수현)는 각각 마약중독의 색정증 환자와 성정체성을 혼동하는 여장남자다.

연극은 이 셋이 합작해 그려내는 환락의 지옥도를 그려내며 오가리가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자식으로 아비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엄마에 대한 원망과 사회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혔음을 알려준다. 처용을 닮은 그의 아비는 “니 에미를 용서하라”는 유언을 남기지만 정작 오가리는 처용의 탈을 쓴 ‘검은 처용’의 “절대 용서하지 마라”는 주술에 사로잡혀 살육을 저지른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해체의 위기에 처한 현대적 가족극으로 풀어낸폴란드 연극 ‘오디세이’.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 역을 맡은 배우가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다. 지지멸렬한 현실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요즘 청춘의 모습이 그의 모습에 
투영됐다. 한국공연예술센터 제공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해체의 위기에 처한 현대적 가족극으로 풀어낸폴란드 연극 ‘오디세이’.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 역을 맡은 배우가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다. 지지멸렬한 현실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요즘 청춘의 모습이 그의 모습에 투영됐다. 한국공연예술센터 제공
‘오디세이’ 역시 신의 저주보다 강렬했던 오디세우스 가족의 가족애를 해체위기에 처한 현대적 가족상황으로 뒤집는다. 사회적 불만에 가득 찬 현대적 열패아(루저)의 형상을 한 텔레마코스는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지위를 탐내는 예비 새아버지들을 증오하는 만큼 아버지의 역할을 방기한 오디세우스에 대한 회의와 불만에 가득 차 있다. 20년의 독수공방 세월을 견뎌낸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자신이 남편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남성우월주의의 희생양이라고 항변한다. 귀환한 오디세우스 역시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의 가부장적 권위에 입은 손상을 못 견뎌 하는 ‘꼰대’로 그려진다.

두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은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니라 그 아들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비의 신화화된 권위를 회의하고 부정하고 심지어 능멸하는 존재다. 그것은 서구지성사에서 미토스에 대해 로고스가 취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연극은 미토스에서 출발했다. 미토스는 진실을 감춤으로써 그것을 드러내는 이중화법의 귀재다. 하지만 리얼리즘의 세례를 받은 현대연극은 로고스에 중독됐다. 젊은 연극인들은 이를 간과한 채 종종 ‘비겁한 미토스의 살해’를 통해 ‘음흉한 로고스의 승리’를 선언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외눈박이 로고스로는 결코 미토스의 지혜에 닿을 수 없다. ‘나의처용…’도 결국 ‘용서하지 마라’가 아니라 ‘용서하라’가 옳았음을 스스로 반증하지 않던가. ‘오디세이’ 역시 아무리 젊은 패기로 무장했다한들 신의 저주에 굴복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일리아스’와 달리 신의 저주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의 가치를 지켜낸 ‘오디세이아’의 진가엔 둔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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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처용…’은 28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2만∼3만 원. 02-3279-2233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공연 리뷰#미토스#로고스#망연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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