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댁, 거제 아지매 다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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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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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다문화가정 이수범-날도자 씨 부부가 사는 법
민속박물관 도시민속팀 9개월 밀착 조사

올해로 결혼 10년째를 맞는 이수범(오른쪽), 날도자 로살리 씨 부부는 아들 상진이, 딸 수진이와 함께 외출도 자주 한다. ‘다문화 전도사’로 불리는 이 씨는 아내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함께 장을 보며 거제 내 필리핀 사람들의 모임에도 항상 참석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올해로 결혼 10년째를 맞는 이수범(오른쪽), 날도자 로살리 씨 부부는 아들 상진이, 딸 수진이와 함께 외출도 자주 한다. ‘다문화 전도사’로 불리는 이 씨는 아내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함께 장을 보며 거제 내 필리핀 사람들의 모임에도 항상 참석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경남 거제시는 ‘남해의 분당’으로 불린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발전한 신도시인 데다 거제시민의 월평균 임금이 257만 원으로 전국 1, 2위를 다툰다. 전업주부의 비중이 월등히 높고 자녀에 대한 교육열도 뜨겁다. 경기 성남시 분당과 크게 다른 점은 주부 가운데 동남아시아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이 많다는 것이다.

강경표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거제의 다문화가정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제는 농촌 지역 다문화가정과 달리 도시형 다문화가정의 특징을 연구할 수 있는 드문 지역입니다.” 그는 팀원이 4명인 거제 도시민속조사팀을 꾸려 올 1월 거제로 향했다. 주요 연구 대상은 삼성중공업 용접공인 이수범 씨(46)와 필리핀이 고향인 부인 날도자 로살리 씨(35) 가정. 팀원 4명은 9개월째 부부의 86㎡(약 26평) 아파트를 거의 매일 찾아가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 거제도의 ‘중산층’ 다문화가정

거제는 조선업 기반 도시다. 1970년대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이 들어선 후 두 조선소를 중심으로 상권과 주거지, 교육 및 편의시설이 조성됐다. 현재 거제 인구 23만 명 중 조선업 종사자는 5만5000여 명. 3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전체 가구의 70% 이상이 조선소와 관련이 있다.

결혼이주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도 해마다 늘고 있다. 올해 결혼이주여성은 총 1104명으로 대부분 조선소 종사자와 결혼했으며 절반 이상이 귀화했다. 강 팀장은 “도시 특성상 미혼 여성이 적어 이곳 남성은 다른 지역의 여성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 살아야 한다. 거제에서 살려는 한국 여성들이 많지 않다 보니 국제결혼을 하는 비율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 씨와 날도자 씨도 비슷한 사연으로 부부가 됐다. 이 씨는 맞선을 봐도 거제로 와 살겠다는 여성이 없어 고민하다 2002년 8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날도자 씨를 만나 그해 9월 한국에서 결혼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농어촌 다문화가정과 달리 날도자 씨네는 중산층에 속한다. 그래서 생활하며 고민하는 부분도 다르다.

“농어촌으로 시집 간 친구들은 농사일을 계속하다 보니 한국어를 배울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러다 가족 간 오해도 쌓이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죠. 하지만 여기선 정착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핵가족 비중이 높아 시어머니와의 갈등도 덜한 편이에요.”

날도자 씨네도 분가해서 산다. 경상도 억양이 강하지만 열심히 배운 한국어 실력이 수준급이다. 농사일 대신 초등학교 외국어 보조강사로 일하고 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학교와 유치원에 가면 분당 주부들처럼 필리핀 친구들과 만나 고향 음식을 해먹거나 쇼핑을 즐긴다.

○ 도시형과 농촌형의 차이점 그리고 공통점

정보 인프라가 발달된 도시에 사는 다문화가정은 농촌형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량이 월등히 많다. 그 덕분에 최근 들어선 향수병도 심하게 앓은 적이 없다. 날도자 씨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매일 아침 필리핀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필리핀에 사는 형제자매들과 수시로 SNS상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인터넷은 한국에 시집온 이주여성들과의 연대에도 도움이 된다. 날도자 씨는 다문화가정의 ‘동료 선후배’들과 경험담을 나눈다. 거제 생활 10년째로 ‘고참’인 그는 ‘신참’ 필리핀댁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역할을 주로 맡는다.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가장 커요. 시어머니들의 강한 경상도 억양이 마치 화를 내면서 며느리를 나무라는 것 같거든요. 페이스북에 시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오면 댓글이 300개씩 달려요. 저는 대부분 ‘오해이니 풀어라’고 조언하죠. 그리고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해줘요.”

거제는 다른 신도시처럼 학부모 모임이 활발하다. 여기서 학원과 교육 정보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날도자 씨는 이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다. 아들 상진이(9)는 초등학교에서 ‘필리핀 애’라고 놀림을 받는다. 이는 농촌형 다문화가정과 다르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한두 번 학교 공개수업을 갔어요. 하지만 저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자존심이 상했어요.”(날도자 씨)

“상진이는 영어 필리핀어 한국어를 할 줄 알아요. 한국 음식과 필리핀 음식을 다 잘 먹지요. 우린 한국 가정보다 경험의 폭이 넓고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냉랭합니다.”(이 씨)

부부는 의기소침해진 상진이가 자신감을 가지도록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 필리핀으로 유학 보낼 생각이다.

강 팀장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핵가족 중심의 날도자 씨네 가족 연구는 향후 다문화가정에 대한 종합적인 정책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거제 도시민속조사팀은 다음 달 현지 조사를 마치고 서울로 향할 예정이다. 연구 결과는 내년 상반기에 2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거제=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거제도#중산층#다문화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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